그 남자의 구두
파리가 미끌어질 정도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구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은 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간다.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멋진 의상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회색 울 실크 쟈켓, 각이 잡힌 새하얀 와이셔츠 소매깃, 분홍 넥타이... 미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한 유학원 원장의 깔끔함에 나는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저 구두는 누가 닦았을까. 사랑스런 아내의 솜씨일까. 구두닦이의 손을 거쳤을까. 저 정도면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이 소요되었을 터이다. 성공한 남자들의 구두는 대부분 타인의 손을 거쳐 닦여진다. 그들은 아내가 쓸 돈 보다 더 많이 벌어와 아내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노동력을 충분히 살 돈이 있으며, 또 너무 바빠 구두 닦을 시간이 없을 것이므로...
남자의 구두는 지위를 상징하고 경제력을 나타낸다. 잘 닦인 구두는 덜 닦인 구두에게 명령한다. 시인 유홍준은 〈喪家에 모인 구두들〉에서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라고 갈파했다. 옷은 빌려 줄 수 있지만 나에게만 맞는 문수가 있는 구두는 아무에게도 빌려줄 수가 없다. 구두는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이다.
지하철에서 눈 둘 곳이 없을 때 남자들의 구두를 본다. 간혹 기대와 어긋나는 경우도 있지만 구두는 입성과 일치한다. 적당히 더럽고 적당히 깨끗하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남자의 구두는 가죽임에도 축 늘어져있고 백화점 남자 사원의 구두는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다.
나는 지나치게 잘 닦여진 남자의 구두를 보면 무섭다. 폭력성이 느껴진다. 프로이드가 나를 본다면 정신분석을 하자고 달려들지 모르지만 번쩍번쩍한 남자의 구두는 나의 의지를 무시하고 내 위에 군림하고 나를 지배할 것만 같다.
신혼 시절, 남편이 출근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빛나게 닦아주던 구두를 기억한다. 세상에 나가는 남편의 구두가 자랑스러웠고 그가 가는 곳을 사랑했다.
나는 이 세상 남자들이 아침마다 명상하듯이, 기도하듯이 스스로 구두를 닦으면 좋겠다. 구두를 닦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생각하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뱃살이 너무 찌지 않아야 허리를 구부려 자기 구두를 닦을 수 있으니까.
윤흥길의《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는 셋방에 살지만 아침마다 아홉 켤레의 구두를 정성들여 닦았던 윤 씨라는 사내가 등장한다. 부인 출산비가 막막해 주인집에 도둑으로 침입했다 들키자 아홉 켤레의 구두를 두고 사라진 윤 씨에게 구두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고달픈 생활만큼 축이 닳고 앞 코도 부딪쳐 흠이 있는 구두가 나는 편하고 좋다. 선거철 후보들의 구두를 보고 투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