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제 길의 발원지
(孝悌 道 發源址)
문 영 휘
푸른 하늘 아래에서 기쁨보다 어려움이 많았던 조선 말엽에 서민 중에도 겸손한 효인
이 있었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글공부보다 소를 치며 논밭을 가꾸고 살아야만했던 분이
었으니 그가 살던 곳은 바로 청도 화양읍이다. 이곳에서 9대(九代)를 이어 지켜온 효자 문재
인(文在仁:1888.12월 생)의 자(字)는 성칙(聖則)이고 우남(又南)은 그의 호(號)이며 13명의 대
가족을 거느리고 농사를 짓던 그는 바로 내 아버지 시다.
많지 않은 전답도 선도(先導)영농으로 가꾸며 시범을 보였다. 그러나 휴식을 취할 곳이라곤
햇빛을 피한 들판 가로수 그늘 밑이고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소를 몰고 모두 집안으로 돌아
와서 손발을 씻고 가족 함께 정겨운 격려성 대화로 그날 하루 일을 정리하곤 했다. 이를 보
고자란 아들인 나에게는 나이든 지금 와서 그때의 생활을 떠올리게 되니 시간을 놓치고 하
늘을 향해 떠오른 비행기를 보고 발을 동동 굴리며 손짓하는 격이다. 이제 어쩌는 수없이
살아오신 선친의 지난 흔적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이 온순하여 자라면서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이웃으로부터
작은 생선, 과일 하나라도 신선한 것이 들어오면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린 후에 들었으며
부모님의 분부에는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지혜롭게 해결하며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혼이 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대외활동 뒷바라지 문제가
풀리지 않고 어려움에 처하자 대노(大怒)하여 누에 때문이라며 4령(齡)에 이른 양잠 중의 누
에까지 버리라는 영을 내렸다. 가내 영농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봄, 가
을 철 따라 부업으로 품삯을 지급하며 힘겹게 기른 상족(上簇)단계에 있는 누에마저 저버리
라는 호통에 할아버지의 뜻과 상충(相衝)되었으나 곧 몫 돈까지 취하게 될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라린 심정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순응하여 문제 해결의 뒷받침이 되었다고 한다. 요
즈음 같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의 대상이 될 것이 눈앞에 선 한데 그러나 말없이 뒷수습
을 잘 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경작하던 일급 과수원 적산(敵産)농지 재분배 시에도 공의 기술
적인 경영능력을 감안하여 배정에 우선해 주겠다는 로비청탁까지 거역하고 오히려 정부의
농지개혁 시책에 앞장서서 영세 소작인들의 실익을 위해서 논과 밭, 과수원 등의 독립 자작
농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하기도 하며 부모를 조용히 모시고 고향을 지켰다.
그리고 뒷집 소녀가 정신이상으로 지나면서 불씨를 던져 일어난 화재에서 문간 집 한 채
와 일년 내내 땀흘려 추수하여 거두어 집 안마당에 쌓아둔 많은 벼가래며 농구 등 경제적
정신적 손실을 심하게 입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은 변상청구를 권하였으나 사양한 체 오히려
그 가난한 소녀의 아버지에게 위로를 한 사실로 많은 인리(隣里)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
다. 오히려 그분과는 친분이 더 두터워 졌고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림(儒林)정신으로 인(仁)과 예(禮)로서 주위 어른을 모시고 공경하며 귀천
상하를 가리지 않고 향약을 통한 상부상조하는 계(契:공동체) 활동과 오늘까지 계승 발전하
여 온 소싸움, 줄다리기 등 전통 민속 문화보존에 심기(心氣)를 다하며 이바지하는 한편 지
방 자치행정과 교육민주화의 뒷받침으로 감사장까지 받기도 하였다.
더욱이 자녀교육에도 세상에서 잘살고 못사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본인(本人)중심의
스스로의 노력을 강조하는 ‘자수성가 정신의 처세 교육’을 하면서 슬하(膝下)의 자녀에게
는“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며 네 것, 내 것 하는 마음의 욕심 없이 참된 애정(愛情)으로 이웃
하여 더불어 살아라”고 하며 집터까지 나누어 정해주며 아들 저의 형제들에게 우애를 강조
한 사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이야기다.
특히 화목한 가정을 가꾸다 끝내 부친(조부님)이 별세한 후에는 많은 조객들의 조문을 받
아가며 자택 가까운 양지 바른 곳 신봉안산(新奉案山)에 안치하고는 매일같이 문밖을 나설
때면 그곳 묘소에 먼저 발걸음을 돌리고 들짐승이나 풍수해가 없었는지 보살폈다고 한다.
더욱이 살아 계신 연로한 모친(94세)을 모시면서 항상 건강을 살피고 출타 시에도 무작정
유하고 오는 일없이 돌아와서 문안을 드리며 몸과 마음을 아울러 다하니 인근 고을사람들은
천륜에 따라 부모의 뜻을 헤아린 효행자라 하고 이 지역을 지날 때는 ‘효자 문 아무게’가
사는 곳이라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논어》 이인(里人)편에 나오는 글귀와 같
으니 즉 “부모가 살아 계시면 멀리 떠나지 아니하며 떠날 때는 반드시 행방을 알려야 하느
니라. (子曰 :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자왈 : 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고 한 것은 바로 이 문
효자를 두고 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나라 공부자 성칙묘(聖則廟)에서는 단자를 통해서 올라온 효행사실을 검토하고 중국
한漢나라 효자 영숙(潁叔)과 오吳나라의 명망이 있었던 효인 육적(陸績)에 비하여 칭송하며
각 3명의 판서와 참판, 각도 대표 도유사 등 29명이 서로 뜻을 모아 “문 효자가 사는 마을
을 칭찬하며 사회의 떨어진 풍속을 다시 재기시켜 돈독(敦篤)하게 하고 퇴폐한 흐름을 맑게
하기에 노력하였으니 어찌 한때의 본보기에 지나지 않은 다고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포
상(褒賞)을 증(贈)하고 공부자대성묘 오륜행실중간소에서는 정려각(旌閭閣)을 세워서 8역(전
국)에 알리고 그 행적을 오래도록 전하고 교화하라는 포상(褒賞) 완의문(完議文)까지 발표한
효자였다. (공부자 성칙묘의 표창완의문과 남평문씨사적기 참조)
영국의 노벨수상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효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위대한 사상이
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효는 “시대를 초월하고 이념과 국경, 인종의 구분 없이 전 세계
인이 그리워하며 인류애에 보탬을 주고 세상 빛 밝히는데 거름이 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이 예나 지금이나 덕으로 인륜을 찾고있는 뜻 있는 이곳 지방 인사는 그를 두고“효자로
서 법(法) 없이도 살 분이다.” 라고 평하고 있다. 함자(銜字)처럼 인(仁)의 정신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자효(慈孝)로서 살아오셨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문 효자가 효행생활을 한 보
금자리인 살던 집을 중심으로 오고가던 골목길, 들판 길과 누비고 다니던 역내 거리 지역
전체가 효인 생활의 발판이었으니 곧 선친이 살던 그 집터가 “효제(孝悌)길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제는 지역민 모두가 축적된 지혜와 역량을 모아 너나없이 조상들이 지켜온 청도
를 효 문화의 전원도시로 가꾸고 만인이 찾아오는 고장으로 발전시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
음 간절하다.
* 상족(上簇) : 마지막 잠을 자고 난 누에가 고치를 지을 수 있도록 섶에 올리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