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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서독(東邪西毒), 시간의 재    
글쓴이 : 김창식    13-08-18 13:44    조회 : 6,002
 
 동사서독(東邪西毒), 시간의 재 
 
 
 한 달 반도 넘게  이어지는 장수(長壽) 장마의 끝자락을 비집고 무더위가 삐죽삐죽 얼굴을 내미는군요. 그래 봤자 올여름의 수명도 이제 한 달 남짓입니다. 더위도 잠시 식힐 겸 추억의 무협영화 한 편 '때리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왕가위(王家衛) 감독의 '동사서독(東邪西毒, Ashes Of Time1994)'은 무협물이지만, 기존의 홍콩 쿵후영화에 익숙한 한국 팬들에게 낯섦과 놀라움을 안겨주었지요. 전통적 무협의 서사를 타파하고 시각 영상을 극도로 추구했습니다. 화려하면서도 황량한 화면 속 풍경,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 무언의 칼부림, 연기를 하는지 춤을 추는지 헷갈리는 배우들의 현란한 액션은 무협 팬들을 혼란스럽게 했어요. 이 영화의 기법은 나중 이안(李安) 감독에게 전승되어 '와호장룡(臥虎藏龍)2000'에서 한층 유려하고 업데이트된 버전으로 변주되는군요.
 
 백타산(白打山) 도화림(桃花林)에 사는 서독(西毒) 구양봉(장국영)은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형의 손에서 자랐어요. 유명한 무사가 되는 것이 꿈인 구양봉은 사랑하는 여인이 형과 결혼하자 고향을 떠나 사막에 여관을 차립니다. 사실 여관은 겉모습이고 내막은 살인청부 에이전트입니다. 냉소적으로 변한 구양봉을 중심으로 동사(東邪) 황약사(양가휘), 영락한 검객 홍칠(장학우), 맹무살수(양조위) 등 저마다 가슴에 상처를 지닌 무림의 고수들이 모여들지요.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회한에 사로잡힌 이들은 현재에 정착하지 못한 채 사막을 등집니다. 세월은 흐르고 구양봉 역시 옛사랑인 형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관에 불을 지르고 사막을 떠납니다.
 
 '동사서독'은 홍콩 출신으로 역사무협의 대가인 김용(金庸)의 소설 '사조영웅전('영웅문 1부'로 알려짐)'과 '화산논검'에서 무림고수들의 캐릭터를 차용했어요. 그중 서독 구양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의 줄거리는 정작 위의 원전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대종사(一大宗師)인 서독 구양봉과 동사 황약사는 원래 원수지간인데 친구로 설정된 것을 보면, 왕가위 감독이 특유의 상상력으로 그들의 젊은 시절을  조명한 것 같기도 합니다. 구양봉과 황약사를 비롯해 네 명의 무림 고수와 같은 수의 여자가 나오는 '동사서독'은 엇갈리는 사랑의 매듭을 풀어내지만, 인물들의 관계가 생태계의 먹이사슬처럼 엉켜 있고 에피소드들이 중첩돼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무협물답지 않게 'Ashes of Time(시간의 재)'임을 떠올리면, 왕가위 감독의 관심사가 호쾌한 무협 액션이 아닌 '시간의 지평'에 대한 성찰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작인 '아비정전(阿飛正傳1991)'이나 '중경삼림(重慶森林1994)'이 그러했듯. 영화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과거 지향적이거나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에 멈춰 있어요. 등장인물들이 사막을 떠나지만 그들이 '도화림'에 도착했는지는 모릅니다. '도화림'은 '이상향'이자 '과거의 표상'이며 '갈 수 없는 나라'이거든요. 영화의 황량한 사막 풍광은 뉴 저먼 시네마의 귀재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원래 사막 풍경이야 비슷하기 마련이지만 말이죠.
 
 결국 이 영화는 무협의 외피를 두른 현대 영화입니다. 자주 등장하는 스틸 컷(정지 화면)과 핸드 헬드(Hand-held) 기법을 사용한 흔들리는 화면은 현대인의 불안을 은유하며, 시향(詩香) 가득한 방백(傍白)은 인물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트라우마를 드러냅니다. 시적인 영상에 사변적이고 회한 가득한 대사가 결합돼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스타일리시한 영화죠. 몇 몇 대사를 인용합니다.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의 모습은 때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술과 물의 차이점? 술은 마시면 몸이 달아오르고 물은 마시면 몸이 차가워지지."
 "검이 빠르면 피가 솟을 때 바람소리처럼 듣기 좋다던데, 내 피로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이틀 동안 문 앞에 앉아서 하늘이 변하는 걸 보고서야 이곳에 오랫동안 있으면서도 사막도 제대로 못 본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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