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이 1930년대에 쓴 《고향》이라는 시의 일부인데 작곡가 :namespace prefix = st2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가고파》와 함께 학창시절 내가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다. 그리운 마음을 안고 찾아온 고향의 겉모습은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동심으로 느꼈든 옛 고향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실감을 노래한 가곡이다. 애절한 멜로디와 함께 젊은 시절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곤 했다.
우리에게 뭔지 모를 물씬한 그리움과 포근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고향, 부모형제 함께 행복하기만 하던 그 보금자리, 개구쟁이들의 장난과 킬킬거림으로 세월이 가는 줄 모르던 그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초등학교 죽마고우인 J군의 강권에 못 이겨, 떠나 온지 반세기가 다되어 녹차의 고장 보성을 향해 함께 의기투합의 여행길에 나섰다. 가는 도중 광주에 들려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광일군이 사준 한정식을 거하게 먹고는 곧바로 버스에 올랐다. 호남선 열차로 광주에서 환승하여 여수로 가는 지선(支線)에 위치한 보성은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를 안고 있어 당시 인구가 13만 명이나 되는 비교적 큰 군에 속했다.
사실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를 세 군데나 다닐 정도로 이곳 저곳에 살다 보니 딱히 고향이라고 할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초등학교와 개구쟁이 시절을 8년 가까이 보낸 보성이 내 마음의 고향인 셈이다.
추억을 더듬으며 옛 집이 있던 철도관사 터를 가보았다. 10호 정도였던 관사들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는데 내가 살던 1호 관사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캄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람 사는 기척은 없는데 별다른 용도가 없어 아직 헐지 않은 채 남겨둔 듯 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왼편에 작은 공부방, 오른쪽에 안방과 다다미 상하 방, 그 앞 긴 마루를 가로질러 앞마당을 넘나들던 시절이 낡은 필름처럼 머리 속을 지나간다. 그곳에 우리의 삶이 머물렀던 흔적과 함께 어머니의 손때가 아직 남아 있을지. 참 아득했다. 언제 세월이 그렇게 지나갔는지---.
초등학교로 차를 몰았다. 돌 계단으로 된 층계는 없어지고 자동차가 가뿐하게 교문을 넘어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주먹만한 공 하나로 몇 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공을 차던 운동장 건너에 다시 지은 산뜻한 3층 교사가 눈앞에 서있다. 개교 100주년의 긴 세월을 지켜낸 허름하고 오래된 학교의 추억은 어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4학년 초, 전학 와서 맨 처음 들어서던 낡은 교실, 내 출석번호가 101번일 정도로 빡빡한 콩나물 교실 안에서 우리들은 태 정 태 세 문 단 세를 외며 히히덕거렸다.
득량만의 싱그러운 갯바람을 안고 산허리에 조성된 녹차 밭을 오른쪽에 끼고 산 고개를 굽이 굽이 넘어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여름이면 남도의 선남선녀들을 유혹하던 아름다운 해변은 율포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었다. 파도가 하얗게 부셔지던 모래사장은 포구로 변하여 소형 어선 두 척이 만조를 이룬 해안에 한가롭게 떠있다.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해송들은 아직도 짙고 푸르른데 조류의 영향으로 모래가 쓸려가면서 해수욕장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재빠른 상혼은 보성녹차의 명성을 등에 업고 해변에 녹차 해수탕을 만들어 성업 중에 있었다. 불타는 듯 선홍빛으로 물든 낙조를 바라보며 반지락 횟집을 찾았다. 벌교만의 새조개와 감칠맛 나던 전어구이는 옛 추억의 미각 속에 맴돈다.
돌아오는 길, 임부자 촌을 지나치며 어릴 때 노래 잘 부르던 친구가 생각나서 물으니 몇 년 전 작고했다고 한다. 만석궁 집 막내로 태어난 탓인지 왜소한 체격에 체질도 허약하여 결석이 잦았다. 여름이면 가끔 그 집엘 놀러 갔는데 갈 때마다 환대해주던 큰 형수의 하얀 모시옷과 청초한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하지만 달콤한 한과와 시원한 미숫가루 물이 목구멍을 즐겁게 하던 기억은 어제처럼 새롭다. 너른 마당과 반짝거리는 대청마루에 열 개도 넘을 방들이 이어진 부잣집 끌텅이 아직 남아 있는지 새롭게 지은 커다란 기와집이 옛터에 우뚝 서 있었다. 길 병원 집 정진이도 작년 심장 수술 중 죽었다고 하니 학교 때 말도 붙여보지 못한 여자동창들이 없었다면 이번 고향 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 우는〉 그런 고향은 이제 어데서도 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리운 고향동무들 간곳없는 내 고향에 산천도 많이 변했다. 촌 읍들은 계속 인구가 줄고 있다. 피폐한 농촌과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인근의 대도시로 빠져 나간다.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들은 점점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되어간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한(恨)이 시와 노래에 넘치는 것은 정작 누구에게도 고향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앞으로 고향이란 말은 시나 노래 가사에서만 볼 수 있는 고어가 될 것 같다.
어느 수필의 제목처럼 서울엔 고향이 없다. 대형 아파트가 나고 자란 곳이고 빌딩숲을 흐르는 아스팔트 강이 고향산천인 세대들이 꽃피는 산골과 사람의 냄새가 풍기는 고향의 서정을 알 턱이 없다. 자연과 인정에 대한 향수가 없으니 정서도 메마르고 문학적 소재도 빈약한 것이 아닐까? 재탕 삼 탕 우려먹는 사극, 말도 안 되는 재벌놀음이 드라마의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상류사회에 진입한 신데렐라, 혼외정사에 의한 〈출생의 비밀〉로 전개되는 천편일률의 이야기가 TV에서 판을 친다.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소설, 황당한 이야기를 담은 드라이한 소설들이 문제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뭘까?
서정미 넘치는 헷세의 문학은 고향〈칼프〉 마을의 추억에서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광활한 촌 읍〈야스나야 폴랴냐〉 에서 톨스토이의 명작《전쟁과 평화》가 태어났다. 고향을 잃는 것은 우리 마음의 영원한 고향인 어머니를 잊는 것과 같다.
사라져간 내 고향의 옛모습은 이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내 마음속의 빛 바랜 사진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한국산문 2013. 9월호 등단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