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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동네 연가(김현정)    
글쓴이 : 김현정    13-09-14 15:55    조회 : 5,767
   
달동네 연가
 
김현정
 
새벽부터 창밖에서 부웅붕 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일이 터진 걸까. 잠자리를 밀치고 내다보니 소독차가 흰 연기를 뿜으며 골목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음습한 장마철에 우리 동네 시장골목 소독이 꼭 필요하겠다 싶어 새벽잠을 놓친 것도 섭섭지 않다.
내가 사는 곳은 봉천동. 달동네의 대명사였던 곳이다. 奉天, 하늘을 받친다는 이름답게 산비탈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천막집, 판잣집이 닥지닥지 붙어 있던 동네였다.
지금은 미끈하게 재개발이 되어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고 사이사이 녹지대와 산책로, 운동시설까지 잘 갖춰져 달동네의 옛 명성이 무색해졌다. 주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행정상 동 이름마저 행운동 청림동 등으로 감쪽같이 바꿔 빈민촌의 이미지를 털어내고자 애쓰고 있다. 하지만 후미진 골목의 영세상점과 낡은 주택들이 아직 남아 새로운 재개발 플랜카드를 내건 채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 많다.
1970년대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난장이 가족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에 살았다.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작가는 지극히 반어적 주소를 붙여주었다. 책의 내용에 견주어 행복동의 위치를 추정해보자면 지금 내가 사는 봉천고개 어름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70년대 당시 도시빈민층의 주거 밀집 지역이었던 관악산 자락의 봉천동과 신림동, 난곡 일대의 달동네가 아마 조세희의 행복동과 가장 닮은 곳이 아닐까 싶다.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대규모 이농현상이 있었다. 농촌인구가 크게 줄어든 데 비해 도시의 일자리는 아직 풍부하지 않은 시점이어서 이농 인구의 대부분은 단순노동, 노점상, 행상을 하며 도시빈곤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만성적 빈곤상태에서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주택은 산비탈의 저가 불량주택뿐이었다. 늘어나는 빈곤층의 잠자리를 해결하지 못한 정부는 사실상 무허가주택을 묵인하게 되었고 달동네 판자촌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조세희 소설을 다시 넘겨본다. 난장이는 칼 갈기, 건물 유리 닦기, 수도 고치기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한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난장이 동네에 철거 계고장(戒告狀)이 날아든다. 주민들의 저항과는 상관없이 결국 철거는 간단하게 끝나버리고 행복동 주민들 손에는 아파트 딱지만 주어진다. 입주권이 있어도 입주비가 없는 그들은 시에서 주겠다는 이주보조금에 약간의 웃돈을 얹어 받고 입주권을 판다. 거간꾼들의 농간으로 딱지 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다. 영수네도 승용차를 타고 온 사내에게 입주권을 판다.
달동네 딱지거래의 실제 현장에 내가 서본 적이 있었다.
결혼하면서 목동의 시댁 가까이에 신혼집을 장만했다. 그러나 일 년도 못가서 집안의 사정으로 합가를 하게 되었다. 시어른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러 다니던 중 관악구까지 오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 내가 본 관악구는 거대한 공사장 같았다. 달동네 판잣집들을 헐고 대대적인 재개발을 추진하던 때였다. 부동산 중개인은 침을 튀기며 봉천동의 미래와 투자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무조건 딱지를 사시라고요. 돈 놓고 돈 먹기.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눈 감고도 돈 벌 수 있는 길이라니까요. 딱지 값은 나날이 치솟고 있어요. 서두르세요.”
솔직히 말해 세상물정도 모르고 우연히 들른 곳이었다. 그런데 거긴 달동네 주민의 딱지를 가로채어 투기꾼이 되어보시라는 유혹의 현장이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내가 살고 있다. 남편의 직장과 가깝고 두 딸의 학교가 가까워서 이쪽으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그때 관심 가졌던 그 동네에 다시 와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달동네와의 인연은 또 있다. 친정에는 부엌일을 도우며 함께 살던 순덕이가 있었다. 배움의 갈망이 크고 머리도 영민했다. 어려서부터 남의집살이 하느라 학교문턱을 못 넘어본 게 안쓰럽다고 친정어머니는 그녀를 공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순덕이가 나날이 머리가 영글어지고 기뻐하는 것을 보며, 나는 학교에 못 다니는 처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보람이라고 느꼈다. 대학에 입학하자 야학 동아리에 들었다. 휘황한 대학가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가장 가난하고 그늘진 봉천동까지 가는 길은, 실제로나 의미로나 꽤 먼 길이었다. 혼자서 등사기를 밀어 수업자료를 만들고 야심한 밤에 귀가하는 고충도 있었지만 근로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재미는 컸다. ..공에 나오는 영수나 영호 같은 아이들을 야학에서 가르치던 그 때도 봉천동 달동네를 드나들었다.
 
법대에 들어간 큰딸은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했다. 신림동 역시 대표적 달동네였던 곳이다. 1987, 지금의 대학동 지역에 재개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긴 했지만 도림천변에서 관악산등성이까지 집집이 어깨를 맞대고 형성된 고시촌은 여전히 무질서하고 비위생적이다. 크고 작은 원룸, 쪽방 수준의 고시원, 고시생식당, 독서실, 고시학원, 게임방 등 작은 구조물 하나까지 고시생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거래가 이루어지는 특수한 집단촌이다. 엄청난 청춘 인구의 희망과 좌절이 넘실대고 동시에 엄청난 부속 인구의 수입이 창출되는 거대한 사업장이기도 하다.
딸은 그곳 고시학원에서 칠판을 닦고 수업자료를 챙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원비를 면제받곤 했다. 지금 우리 사위가 된 딸의 선배와 함께 그 일을 하며 한동안 신림동 고시촌을 전전했다.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려고 그 동네에 가보면 건물만 새것일 뿐 달동네의 분위기를 탈피하지 못한 궁핍의 그림자가 버섯처럼 숨어 피어있었다. 사실 동네는 가난하지 않은데 거기 머무는 구성원들이 더 찢어지게 가난한 경우가 많았다. 햇빛도 들지 않는 손바닥만한 지하방에 책상하나 달랑 놓여 있고 몸을 비스듬히 누이기도 빠듯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이런 조잡하고 북적거리는 분위기 속에도 놀랄만한 긴장과 질서가 내재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라의 큰 일꾼이 배출되기도 하고 고시촌의 이색체험만 간직한 채 소리 없이 물러나는 젊음도 적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 달동네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추억과 이야기가 담긴 영원한 마음의 본향이다. 달동네 빈곤층의 신산(辛酸)했던 삶의 애환은 그 시대와 함께 품어야할 우리의 엄연한 역사다. 조세희가 이름붙인 것처럼 낙원구 행복동이 그 주민들에겐 행복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비록 봉천동 토박이는 아니지만 달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고지대에서 맑은 공기 누리며 사는 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봉천동의 당당한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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