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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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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규의 홀로서기    
글쓴이 : 김혜자    13-11-03 16:05    조회 : 5,407
 
 

밝고 귀여운 얼굴에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음을 달고 있는 아이, 민규는 내 둘째 손자다. 목소리가 크고 쾌활한데다 먹성도 좋아 언제나 식탁에 앉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하는 아이. 두 돌이 지나도록 떼 부리며 우는 것을 할머니인 내가 못 봤을 정도로 사교적(?)이고 순한 아이다.

아들이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했다. 외국에 나가서 그 땅에 적응하기까지 수월하게 넘긴 이가 어디 있으랴만 아들네 네 식구 중에서 내 눈에 제일 안쓰럽게 보인 건 꼬맹이 민규였다. 제 부모들이야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한 일이니 힘들지라도 각오한 바일 터이고. 초등학교 2학년인 제 형만 해도 유치원 시절부터 영어를 배워서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이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들었으니 나름 짐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 살배기 민규야 뭘 알았을까.

그렇게도 벙글벙글 건강한 아이였는데, 6개월 만에 가보니 제 엄마 치마폭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막무가내로 울어대는 떼쟁이가 된 게 아닌가. 말이 늦어 미리 영어를 가르칠 수도 없었던 아이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환경에 말도 피부색도 다른 낯선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있는 몬테소리에서 어린 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답답했을까. 가엽게도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밴쿠버에 머무는 동안 민규는 밤만 되면 책을 들고 내게로 왔다. 품속으로 파고드는 예쁜 탄력덩어리 꼬맹이와 한 달 동안 참 많은 책들을 같이 읽으며 짜릿한 행복을 느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다 읽어주었으나 나중엔 문장의 첫 머리만 읽고는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 다음 부분을 녀석이 큰 소리로 외워서 읊었다. 그렇게 흥이 나서 책을 읽다 잠들던 것이 버릇이 되었었나보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한동안은 매일 밤 할머니와 책을 읽겠다며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전화통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이번에는 그동안 저절로 외워진 것을 내가 읊어주었다.

다시 8개월 만에 만났다. 그동안 유치원 과정인 몬테소리에 다니던 민규가 졸업을 했다. 캐나다의 교육제도는 만 4세가 된 해 9월이 되면 초등학교 안에 있는 1년 과정인 킨더가튼(Kindergarten)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부터 공교육인 초등학교과정의 시작이다. 그래서 몬테소리의 졸업은 7월이었다. 마침 여름방학에 맞춰 찾아간 나도 그 졸업식에 참관할 수 있었다.

먼저 캐나다, 인도, 프랑스, 일본, 중국, 한국 등 다국적 아이들이 같이 어울려 학부모 앞에서 1년 동안 배운 율동과 노래를 발표했다. 그중에서 가장 입을 크게 벌리고 예쁜 새처럼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가 바로 민규가 아닌가. 예전의 생기 있고 활발한 모습을 되찾은 꼬맹이를 보며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민규가 다시 명랑한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그 한 분이 말을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해 잔뜩 기죽어 있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아주고, ‘민규는 내 아들’이라며 각별한 사랑의 약을 먹여준 몬테소리의 제니 선생님이다. 졸업식을 마친 후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린 그녀를 향해 녀석이 쏜살같이 달려가 와락 안기던 모습은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한여름에도 습도가 낮은 밴쿠버는 한국보다 서늘하지만 햇볕만은 매우 강렬하다. 외출할 땐 온 식구가 선스크린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 아예 그걸 차에 비치해놓고 수시로 덧발라야 할 정도다. 유치원에서 매일 한 시간씩 마당에 나가 놀 때마다 선스크린을 바르는 훈련이 잘된 녀석은 얼굴과 손, 그리고 팔까지도 꼼꼼히 문질러 바른다. 뭐든 얼굴에 바르는 걸 싫어해 대강 흉내만 내는 제 형과 비교되는 야무진 모습이다.

그해 겨울 내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아들내외와 손자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수술이 잘 끝나자 아들은 바로 직장으로 복귀했으나 며느리와 손자들은 한 달여를 머물며 내 곁에 있어줬다.

두 손자가 노는 걸 보니 급할 때면 민규의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왔고,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서로 영어로 지껄여댔다. 아이는 그동안 누구 도움도 없이 오로지 제 귀로 듣고 제 스스로 영어를 터득한 것이다. 제 아빠 말로는 녀석이 쓰는 영어가 꼭 본토백이가 하는 말 같이 들린다하니 머지않아 네 식구 중에서 제일 영어다운 영어를 하게 되지 않을까.

지금 꼬맹이는 2학년이다. 제 형과 같은 학교에서 오후 3시까지 생활한다. 아침마다 함께 등교 준비도 하고 사이좋게 형제가 나란히 학교에 간다하니 그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기쁘다. 이제 의사소통이 수월하게 된 민규는 무슨 일이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제 힘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학교생활을 즐거워하는 녀석은 스케이팅과 축구도 아주 좋아한다.

방금 축구장에서 친구들이랑 열심히 뛰어다니는 민규의 모습을 영상으로 받았다. 아이의 놀라운 적응력이 새삼 고맙고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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