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공부
두 해 전쯤 일이다.
일상을 벗어나 무엇인가를 해야할 생각에 내가 처음 찾아간 곳은 대학 평생 교육원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상명대학 영어 회화반에 등록 했다.
강의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자리 잡고 있는 선배님들과 젊은 원어민 교수조차 나를 반겨 주었다. 탁월한 선택에 마음까지 뿌듯했다.
용기를 얻어 다음 학기에는 보다 전문성이 있는 아동 청소년 상담 심리학이라는 강좌에 등록했다. 연세 대학교까지는 교통이 조금은 복잡했지만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내가 이 강좌에 거는 기대는 두 가지였다. 우선은 손주들의 사춘기에 대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손주들을 위한 동화 한편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개강 날 강의실에 들어간 나는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나 후회했다. 수강생의 대부분이 딸 아이 또래이거나 더 어린 젊은이들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잠시 그들의 구경꺼리가 되어야 했다. 어차피 강의실에 들어왔으니 첫 시간은 참석하고 등록을 취소 해야되겠다고 생각 하면서 태연한 척 마음을 가다듬었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강사가 첫 시간이니 자기 소개를 하라고 한다. 출석부 차례로 소개되는 수강생들은 초 중 고등학교 현직교사를 비롯하여 종교 단체에서 온 대부분이 자격증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 상담사 지망생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나갔다.
“나는 2남 1녀를 둔 어머니이고 4남 2녀의 할머니입니다. 내가 이 강좌에 오게된 사연은 지금 사춘기를 호되게 앓고있는 우리 맏손자와 그 아이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있는 며느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예상치 않았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
수강생들은 나에게 따뜻한 눈빛과 미소를 보내왔다. 여기에 힘입어 등록을 취소 하려했던 계획은 슬그머니 도전을 해 보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강좌 소개가 있었다.
이 강좌는 학부 학생들의 수강이 허용된 수업이고 학점이 인정되는 나에게는 생소한 학점 은행제라는 강좌였다. 따라서 중간,기말 시험을 비롯하여 리포트까지 제출 해야하는 크게 부담되는 과정이었다. 강의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 하지않고 인터넷 등록을 한 것이 큰 실수였다.
소개 받은 교재를 구입해 들춰 보니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대학원 시절 작가와 작품 분석 때 자주 만났던 시그먼드 프로이드였다.
프로이드만을 의지하고 중간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나니 다음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 때로는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상담 실습을 하는 과정이었다. 서로가 상담자와 내담자가 되어 역할을 바꿔하는 수업이다.
그즈음 어느날 나는 며느리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손자의 사춘기 증세가 극에 달했다는 내용이었다. 며느리의 아픔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나는 손자와의 접근을 시도했다. 우리는 매주 주말을 상담자와 내담자가 되어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손자의 마음을 열기 위해 나는 심리학에서 배운 실력을 총 동원했다.
결국 아이의 속 마음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예상대로 손자의 불만은 지나친 엄마의 간섭과 규제가 심한 학교 생활이었다. 아이는 그동안 가슴속에 품어왔던 분노를 있는대로 토해 놓았다. 나의 첫 번째 목적은 달성 되었다. 나는 손자에게 무료로 제공된 최고의 상담사였다.
얼마 후 기말시험을 치렀고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만족 했다.
마지막 과정인 리포트는 부담 되는 숙제였다. ‘나의 장점과 단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나의 단점과 장점은 뒤 섞여져 있어 구별이 쉽지 않아 스스로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평소에 자신의 문제에 그다지 관심 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긍정적인 점은 가능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하면된다는 무리한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인생인데 굳이 고통스러운 길은 걷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닫혀진 문앞에서 문을 열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두두려 보려 하지도 않았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장점인지 몰라도 그것은 극도의 소심증이었다.
이렇게 써 내려간 나의 리포트는 무사히 통과 되었다.
모든 과정이 끝났고 기다리던 수료식 날 학점 인정증을 받았다. 더불어 전혀 기대 하지 않았던 공로상까지 받았다. 교육 과정의 운영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상을 준다는 내용은 나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했다. 아마도 왕 언니에게 주는 경로 우대증이라 생각된다.
성장통에서 벗어난 손자는 지금은 자기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말레시아에 있는 쿠알라룸프르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다. 얼마전에는 우수학생으로 선발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전화를 통하여 들려오는 며느리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나 역시 용기있게 밀고나간 나의 수강 결정에 무척 행복했다.
나의 소심증이 늦은 공부를 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를 짓 눌렀던 대인 기피증 내지는 공포증마저도 극복 되었다.
집순이를 벗어나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고 있다.
늦은 공부는 나를 변화 시켰다.
나는 이렇게 달라지고 싶다.
하면 된다.
두두려라, 그러면 열리리라.
2014.<한국산문>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