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부모님이 보고플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시아버님 제사를 마치고 시동생들이 집으로 내려갈 채비를 하자 나도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겠단 생각에 남편을 앞세워 무작정 출발했다.
양산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도착해서 술 한 잔 부어 올리고 우두커니 앉아있자니 노루꼬리마냥 짧은 겨울해가 식어버린 햇볕 한 줄기 그어 놓고 산 뒤로 훌렁 넘어가버렸다. 해질녘의 산소는 왜 그리 쓸쓸하던지, 인정머리 없는 겨울바람에 물기 하나 없이 말라버린 까칠한 봉분이 말캉한 엄마 품을 더욱 그립게 했다. 별 고달플 것도 없는 부모노릇 집어치우고 응석 부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콧잔등이 다 시큰거렸다.
회귀하는 연어처럼 오래 묵혀 두었던 기억들을 더듬어보고 싶어서 부산으로 향했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생 때 떠나온 이래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나마 친정으로 여기던 큰오빠마저 세상을 뜨고 나자 내게 부산은 그저 대한민국 지도 끄트머리에 있는 항구도시일 뿐 마음먹고 찾아갈 만큼 특별한 곳은 못되었다.
수필가 목성균님은 “나의 고향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유토피아”이며 자신을 성장시켜준 고향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내게 고향은 나의 성장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 내 속에 묵정밭처럼 방치된 ‘고향’에게 미안해서, 다투지도 않았는데 서먹해져버린 친구를 만나러가는 마음으로 자갈치시장을 찾았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자갈치시장은 바다가 보이고, 방파제에 줄지어 앉은 낚시꾼들과 온갖 해산물들이 가득 들어앉아 뽀글뽀글 공기방울을 내뿜던 빨간 고무대야들이 늘어서있던 키 작고 소박한 풍경이었다. 한데 지금은 미련하게 덩치만 큰 빌딩들과 거기에 우악스럽게 매달린 횟집간판들만 눈에 띄니, 바다는 어디쯤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고 낚시꾼들은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자갈치가 변한 것은 시대의 흐름일 테지만 내 것도 아닌 사탕을 손에 들고 있다가 졸지에 빼앗긴 어린 아이처럼 괜시리 심통이 났다.
시장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45년 전통의 3대째 원조 꼼장어구이집에 들어갔다.
가운데 동그랗게 연탄화로를 끼고 앉은, 식탁이라 하기엔 민망한 모양의 탁자는 45년의 세월만큼이나 낡거나 늙어서 식탁구실이나 제대로 할까 염려스러웠다. 손님이 들어와도 아는 체하지 않던 주인아주머니는 연탄불에 그을려 누렇게 변한 멜라민 접시에다 손바닥 길이만큼이나 긴 오이와 한입에 먹기엔 버거운 굵기의 당근과 깻잎을 쏟아질 것처럼 가득 담아 툭 던지듯 놓으며 묻는다.
“꼼장어 2인분이지예?”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서더니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장어 두 마리를 잡아 도마에 박힌 송곳에 머리를 가차 없이 콕 찔러 고정시켜놓고 단칼에 껍질을 벗겼다. 시퍼렇게 날선 식칼로 리듬도 경쾌하게 탕, 탕, 탕 토막을 내서 한껏 달아오른 연탄화로 위에 올려 초벌구이를 감행했다. 허옇게 도륙 당한 채 뜨거운 불판 위에서 꿈틀거리는 꼼장어를 나는 차마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고개를 외로 꼬고는 너무 커서 한 입에 베어 물기 힘든 애꿎은 당근과 씨름을 했다. 자갈치아지매는 그런 내 모습이 가소롭다는 듯 새빨간 양념장으로 버무린 꼼장어를 연탄화로에 올리며 퉁 한마디 내지른다.
“잡솨보고 더 달란 소리나 하지마소.”
송곳에 장어머리 박듯이 쐐기를 박는데, 어쩌면 이 위풍당당함이 3대째 이어지는 전통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대꾸해서는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매콤한 양념장으로 범벅이 되어서도 불 위에서 꼼지락꼼지락 구워지고 있는 모양을 보니 꼼장어란 이름이 참 절묘하다. 표준말인 곰장어라 부르면 쫄깃쫄깃하고 꼬들꼬들 한 맛이 덜한 것 같아 어딘지 좀 아쉽다. 눈 먼 장어라 먹장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깜깜한 바다 밑에서 살다보니 눈 뜰 일이 없었나보다.
맛깔나게 구워진 꼼장어 한 점에 돌 사진만큼이나 빛바랜 추억도 한 젓가락 따라 온다. 광복동을 지나 남포동을 기웃거리고 용두산 공원에도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러 오래된 만화책을 펼쳐보기도 하면서 아련한 유년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꼼장어 접시가 바닥을 드러냈다. 자갈치아지매는 묻지도 않고 남은 국물에다 밥을 비벼 연탄화로에다 올려 주었다. 알루미늄호일 위에서 밥 볶아지는 고소한 냄새가 빨리 먹어보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얼른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가 너무 뜨거워 입천장을 데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젓가락으로 조금씩 떠먹고 있는데 아지매가 한마디 던진다.
“내가 숟가락 안줬능교?”
“아뇨, 숟가락 여기 있어요.”
“그라믄 와 밥을 젓가락으로 떠 먹는기요?”
“너무 뜨거워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밥이란 것은 숟가락 한가득 퍼서 먹어야지 젓가락으로 끼적거리면 복 나간다, 그렇게 먹으니까 살이 안찌지, 그 몸으로 애들은 어찌 키웠냐.” 심지어 “애가 있기는 있냐” 며 마치 소박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딸 잡도리 하듯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황당해하는 내가 재미있는지 옆에서 실실 웃고 있던 내편 아닌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맞습니다, 우리장모님도 늘 집사람한테 밥 푹푹 퍼서 많이 먹으라고 했거든요.”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기에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면 그동안 못해준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갖가지 음식을 해서 많이 먹이려고 애를 썼다. 편식이 심하고 툭하면 체하거나 토하는 등 부실한 막내딸 때문에 엄마는 나만 보면 끌탕을 했다. 돌이켜 보면 엄마를 잠시라도 더 붙들어놓으려는 나만의 작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해서도 종종 밥 좀 많이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는데, 남편은 그걸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자갈치아지매의 잔소리가 노엽기는커녕 그 꺼끌꺼끌한 사투리로 꾸중을 더 듣고 싶어서 젓가락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움도 과하면 체하는 것인지 그날 명치끝에 묵직하니 얹혀있던 것이 꼼장어인지 그리움인지 잘 모르겠다.
2013년 《계간문예》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