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아가 운다
김 아네스
카나리아(Canaria)는 참새목 되새과에 속하는 애완용 새이다. 원산지는 카나리아제도이며 몸길이는 12.5cm-13.5cm이고 날개를 펼치면 20cm-30cm 정도이다. 귀여운 모습과 아름다운 털, 고운 목소리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애완용으로 사육되어 왔다. 특히 수컷의 목소리가 아름답다. 예전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 이런 카나리아를 데리고 갔다. 호흡기가 약한 카나리아는 특히 일산화탄소에 민감했기 때문에 일종의 경고 신호음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런 카나리아가 얼마 전부터 한 여자의 집에서 울기 시작했다. 탄광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이모작 이야기이다.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애쓴 남자의 노고에 여자는 항상 최고 수준의 경의를 표해왔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인품을 보여주었다. 고객감동주의를 표방하며 가족의 심금을 울릴 때면 여자는 그때마다 즉시 명쾌하게 화답해 주었다.
“당신은 퇴직하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나의 VIP야! 당신은 절정의 순간에서 물러날 줄 알아야 해! 난 구차한 인간이 제일 밥맛 없어. 박수칠 때 떠나라잖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꼭 그렇게 해. 퇴직 후엔 내가 확실히 밀어줄게!”
여자는 이렇게 말할 때마다 스스로가 참 괜찮은 여자, 멋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남자가 70세까지는 롱런을 할 것이라는 치밀한 분석으로 여자는 얼마든지 남자를 위해 너그러울 수 있었다. 다른 집들의‘삼식 씨’는 어쩌면 쿨 하지 못한 배은망덕한 여자 탓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세상이 내 맘같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얼마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시장에서의 몸값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너의 눈빛도 왠지 예전 같지 않고, 위로는 젊은 하버드대와 뉴욕대가 1년 단위로 드나든다. TV에서는 연일 선심이라도 쓰는 듯 정년 연장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고 호들갑이지만 이 남자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한때는 여기저기서 스카웃 1순위였던 이 남자! 위기의 남자는 그래도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남자는 자꾸 웃음이 나온다. ‘이제 드디어 비상을 할 때가 오고 있구나!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네.’그런데 남자의 머리에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이 세상에 믿을 건 나밖에 없다. 이렇게 까진 하고 싶지 않지만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대비를 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남자는 부쩍 지인들과의 부부동반 자리를 자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가 입버릇처럼 말하던“당신은 퇴직하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나의 VIP야!”를 모임 자리마다 큰 소리로 외쳐대고 여자를 향해‘브라보’를 선창한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남자의 고교동창들도 그 여자를 향해 술잔을 부딪치며‘브라보’를 복창하고 여자의 후덕함에 일제히 존경심을 표했다. 남자는 여자의 사력을 다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이웃 친지들, 시댁어른들에게까지 확실하게 공증을 끝마쳐 놓았다. 남자는 큼직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놓았다는 생각에 배가 불렀다.
여자는 뭔가 칙칙한 계략이 남자에게 숨어있음을 아직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왠지 불안한 마음이 자꾸 엄습했다. 남자는 거의 보름동안 늦은 밤 새벽까지 무엇인가에 집중하느라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남자가 들어간 욕실에서 느닷없이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여자는 다시 분석했다. 아니 저 남자가 요새 왜 저러는 거야? 눈빛도 표정도 과하게 편안하단 말이지.’남자는 여자를 볼 때마다 안하던 윙크도 했다. 여자는 즉시 인터넷을 켜고 증권계좌와 은행계좌를 샅샅이 조사했다. 아직 무사하다. 도대체 뭐지?
따르릉! 따르릉! 남자는 점심시간에 맞춰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가뜩이나 남자를 수상쩍게 지켜보고 있는 여자는 회사 근무시간 중에 전화를 건 남자의 용건이 정말 궁금했다. 남자는 여자를 삼성동의 한 일식집으로 불러내어 깍듯이 접대를 했다. 여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회가 싱싱하네! 이 집 잘하는데! 당신은 여기 언제 와 봤어?”
“으응, 지난 번 강남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누가 여길 소개해서 와 봤더니 잘하더라구, 당신 회 좋아하니까 한번 먹여야겠다고 생각했지.”
“회사가 요즘 덜 바쁜가봐?”
“....실은 얼마 전에 oooo 제의가 들어와서 연봉 협상을 했는데 공기업이라 공무원들 연봉에 맞추다보니 현재보다 오히려 20% 정도가 더 적더라구, 내가 맘껏 일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것 같기도 해서 고민 끝에 다른 사람한테 양보를 했어.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참에 독립을 해 볼까 해서... 당신 생각은 어떤 지 들어보려고 불렀지.”
“뭐라고요? 도..독립을? 왜 갑자기?”
“요즘 사무실 임대료가 만만치 않더라. 그래서 서소문보다는 용산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구. 당신이 말했지? 쫀쫀한 남자는 싫다며? 박수칠 때 떠나라며? 당신은 구질구질한 거 딱 질색하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남자는 이미 사업 구상까지 다 마쳐놓은 상태였다. 포트폴리오가 담긴 서류봉투를 여자에게 건네주며 일주일간의 말미를 주겠으니 검토해보고 결정하라며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사라졌다. 여자는 그저 멍하니 점점 작아지는 남자의 차량 꽁무니만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들이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가 될 것인지 호언장담을 책임지는 쿨한 여자가 될 것인지 결국 그것이 문제였다. 고단한 그녀는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로 인해 잠시 휴식을 취하려 TV를 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극 중의 대사가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인생이 생선회야? 날로 먹게.”
화들짝 놀란 여자는 어이가 없었다. 한갓‘찻잔 속 태풍’이기를 바라기엔 냄비는 너무나 뜨거웠다.
삼박사일의 장고(長考)를 마친 여자는 옷장과 서랍장을 털기 시작했다. 숨어있던 통장들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집 어디선가 카나리아가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한국산문 20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