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감자를 먹어보셨나요
문경자
시장에서 사온 감자를 삶았다. 약간의 설탕을 찍어 먹는데 시집에서 사카린을 넣어 삶아 먹던 감자 생각이 떠올랐다.
이른 봄 시어머니는 땅속에 묻어 두었던 씨 감자를 꺼냈다. 눈을 크게 뜨고 튼실한 놈을 돋보기 너머로 보며 고른다. 햇빛을 받지 못하고 겨울을 지낸 것들은 얼굴이 짜글짜글하여 말린 탱자같이 변해있었다. 노란 햇빛을 받아 감자를 고르는 어머니의 손등도 감자를 닮았다. 감자의 일생은 어머니 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가 시집을 가서 사는 일도 감자의 일생이라 생각했다. 집안의 모든 일은 어머니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경제를 살리는 장관급이었다. 언젠가 시아버지께서 5일장에 감자를 한 자루 지고 갔다. 감자 판 돈으로 빨래비누, 흰 고무신, 짚으로 묶은 갈치 등 어머니가 주문 한 것을 사오기로 했다. 막걸리에 취해 시장에서 산 보따리를 그만 버스에 놓고 내렸다. 어머님은 하얀 눈을 굴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후로 아버님은 조끼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어 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돌아 가실 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손자 녀석들 과자 한 봉지 못 사준 것이 한이 된다”고 하셨다. 아버님의 속 마음이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씨 감자가 되지 못할 것들을 몇 개 골라내었다. 어떤 운명으로 바뀔지 궁금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여물을 끓이는 사랑채로 못난이 감자를 가지고 갔다. 금방 쇠죽을 끓인 아궁이 속을 뒤졌으며, 그 속에 그것을 던져 넣고는 부지깽이로 잿불을 수북하게 덮었다. 산봉우리처럼 보였다. 바람이 통과할 때 불꽃이 피었다 죽었다 하며 밤하늘 별이 반짝반짝 하는 모양 같았다. 감자가 익는 동안 맏며느리에게 썩은 감자 한 개라도 버리지 말고, 칼로 잘 도려내고 반찬을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상한 감자는 그곳을 도려내고 요리를 하여도 독특한 냄새가 났다.
나는 어머니 몰래 썩은 감자를 거름무더기에 묻어버렸다. 묻어두었던 것이 탄로 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보란 듯이 싹이 나고 꽃이 피기까지 하였다. 나는 감자 꽃인 줄 몰랐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누가 아까운 감자를 버려 꽃까지 피어나게 하냐?” 부엌 쪽에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동네 이장이 외치는 앰프 소리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손발이 저리고 온 몸이 찌릿찌릿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말이 실감났다. 못들은 척하고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을 휘저었다. 불꽃이 빨갛게 피었다.
감자를 굽는 아궁이에서 할아버지 수염 같은 연기가 기어 나왔다. 감자 익는 냄새가 매캐했다. 부지깽이로 뒤지니 숯이 되어 어머니 발 있는 쪽에서 멈추었다. 그 중 조금 탄 감자도 섞여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며느리에게 미안한지 “아이구! 이놈의 감자가 다 타버렸네” 라며 쓴 맛을 다셨다. 일을 많이 하여 갈퀴처럼 생긴 손으로 익은 감자껍질을 벗겨 “먹어봐라”하시며 입안에 넣어주었다. 감자 깐 손톱 밑이 새카많다. 먹어보니 쓴맛에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으니.
그 해 6월 더위가 찾아왔다. 감자 밭에는 꽃이 피어있었다. 어머니는 꽃을 따주어야 알찬 감자를 캘 수 있다고 했다. 인정사정 없이 자주색 하얀색 꽃을 따서 길가로 던졌다. 어머니가 던진 꽃들이 휙 날아가 숲에 떨어졌다. 숲과 꽃이 어울리는 또 하나의 꽃 길을 만들었다. 감자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며 감자 꽃은 순수하지만 수확량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6월경에 잎 겨드랑이에서 긴 꽃대가 나와 취산 꽃차례를 이루고 엷은 자색과 백색의 꽃이 핀다.
감자는 하지가 지나서 캐야 한다. 하지는 이십사절기의 하나인데 망종(芒種)과 소서(小暑)사이로 6월22일경이다. 일년 중에서 태양이 가장 높게 뜨고 낮의 길이가 제일 길다고 한다.
어머니가 감자를 캐서 비닐 포대에 담아두면 아버님은 그것을 지게로 져 나른다. 시원한 그늘에 펼쳐둔다. 알이 굵고 좋은 것은 골라 장날 시집을 보낸다. 나머지는 굽거나 지지고 볶아서 먹기도 하지만 주로 삶아먹었다. 주식으로 먹기도 했다. 가난 했던 시절에는 감자농사를 많이 하는 집을 부러워하던 시절도 있었으니 말이다.
한반도에는 1824년~1825년경에 산삼을 찾기 위해 숨어들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식량으로 몰래 경작하면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감자를 하도 많이 삶아 신물이 났다. 어머니는 새참으로 감자를 삶아 놓아라 하며 들로 나간다. 첫돌을 지낸 아들을 재워놓고 감자껍질을 벗긴다. 잔챙이 들만 골라 놓았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대(大)소쿠리에 담긴 것을 보니 기가 막혔다. 이게 바로 쓴 시집살이가 아닌가 싶다.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끝이 닳아서 숟가락 노릇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하려니 더 힘이 들었다. 주로 그 숟가락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껍질을 벗겼다. 껍질을 얇게 벗겨야 한다. 너무 힘이 들어 아주 작은 것들은 잡초가 수북한 삽작 밖으로 멀리 던져 버렸다. 손가락이 아리고 아프고 쓰리다. 물집이 생기려는지 자리를 잡았다.
10여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새참을 주기 위해 이 많은 것을 해야 하니 입안에 쓴 물이 고였다. 엄마가 달콤한 사카린을 넣어 삶아주던 감자를 먹을 때가 좋았다. 장마비가 내리던 어느 날 어린 것이 빨래를 한다며 냇가로 나간 일이 있었다. 물이 불어나 둥둥 떠내려 가는 나를 동네 아주머니가 건져주었다. 엄마는 생명의 은인에게 감자를 한 소쿠리 담아 갖다 주었다. 지금도 아찔한 그 때를 생각하며 감자를 벗긴다.
아기 울음 소리에 방으로 달려갔다. 내 얼굴을 보더니 더 크게 울어 거울을 보았다. 감자에서 튄 하얀 물이 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니! 왠 하회탈? 그래서 아기가 울었구나. 얼른 젖을 물리고 무쇠 솥에 알몸의 그들을 한 번에 부었다. 불을 떼는 일도 수월하지가 않다. 몇 번인가 열어보며 다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찔러 보았다. 이 즈음 찬물에 사카린을 타서 숟가락으로 골고루 뿌리니 단내가 났다. 들에 나간 가족이 모여 들어 큰 양재기에 감자를 산처럼 쌓았다. 눈 깜작 할 사이에 다 먹어 간다. 어머니는 혼자 “고생했다”라며 딱 한 개를 주었다. 입안에 넣었다. 분명히 삶았을 때 사카린을 넣었는데 왜 쓴맛이 날까! 어머니가 준 감자는 쓴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