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제도가 일부일처제에 만족을 주기위한 제도라면 그것에 걸 맞는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품격 있는 삶이 아닐까? 결혼 전에 충분히 배우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자기와 맞는 상대라고 결론이 내려져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골인되었다면 최선을 다해 상대를 배려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결혼을 했다고 해서 이성에 대한 관심과 자신에 대한 매력을 방치해 놓는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성을 향한 자연스런 관심을 덮어놓는다는 것은 형벌이다. 감정을 숨기고 불씨를 가슴에 안고 가슴앓이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불륜이 아닐까.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다고 해서 넓고 푸른 하늘이 가려지겠는가.
결혼 전 나는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상대가 나를 저 버린 경우도 있고, 내가 상대를 저 버린 경우도 있지만 결코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어쩌면 그 멋진 기억들이 없었다면 나의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행을 가거나 남편과 어딘가를 동행할 때나 혼자 가까운 마트를 갈 때조차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 우연히 옛 애인이나 오랫동안 못 만났던 동창을 만날 수 있을지도…….' 그렇게 된다면 품격 있게 변한 내 모습을 여운으로 남기고 싶었다. 하여 신경 쓰지 않은 듯 옷매무새를 돌아보고 남편도 한 번 더 챙기곤 했었다. 물론 이성만을 의식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즐거운 상상이 부부사이나 인간관계에도 한층 더 활력 있고 긴장감도 있다.
가령 남편의 친구가 갑자기 밤늦은 시간에 내 집을 방문한다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내게는 관심도 없고 단지 남편을 잠시 보러 온 것뿐인데, 나는 오두방정을 떨며 머리를 다듬고 옷매무세를 고치며 거울을 보며 난리를 친다. 이런 내 모습을 남편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사소한 이런 노력들을 소위 ‘간음’이라고 치부한다면 기꺼이 돌 세례를 맞으리라.
이성을 향한 뛰는 가슴이 없다는 것은 죽은 심장이 아닌가. 종로 3가 파고다 공원에 가면 헤아릴 수 없는 이 땅의 퇴역노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그 주변에는 또 한 무리의 노인들이 콜라텍이라는 공간에서 파트너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연스런 현상이며 이성을 향한 끌림이리라. 그것은 지식의 고저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는 본능이리라. 고상한 체 뒷방 노인네로 전락하기 보다는 사회악을 조장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감정에 충실하며 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어르신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꼭 그들이 만나서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만남 그 하나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며,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돌고, 기대감에 부풀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엔도르핀이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다이놀핀의 생성효과는 엔도르핀의 4.000배이다. 우리가 즐거움을 느낄 때, 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이라는 아주 유익한 호르몬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특히, 굉장한 감동이 왔을 때는 다이놀핀이 생성된다. 이 호르몬들이 우리 몸의 면역 체계에 강력한 긍정적 작용을 일으켜 암을 공격한다. 이 강력한 호르몬 생성에 도움이 되는 만남에 대한 기대감, 그 좋은 감동놀이를 마다할 일이 없잖은가.
수명 100세 시대를 살면서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적 같은 사랑의 기대감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굉장한 감동의 도가니가 아닐까. 하물며 어린이집 다니는 꼬맹이 녀석들도 예쁜 여자 친구 쟁탈전을 벌이는 시대다. 그 열매가 감동 종합 선물 세트인 사랑이리라.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런 현상이며 아름다운 과정인지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리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후 남자(아담)를 만들었고 외로운 아담을 위해 그가 잠든 후 그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어 여자(이브)를 만들었다. 이처럼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맺어질 수밖에 없다. 당당히 양지(陽地)로 나와서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골고루 공짜로 주는 광합성의 효능을 즐기듯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설렘, 다이놀핀의 생성을 즐길 일이다.
화장을 하고 몸매를 가다듬고 치장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남들에게 어필하고 싶은 본능이 심리적으로 깔려있다. 그것이 가장 먼저 작용하는 것이 이성에 대한 발견이 되었으리라. 옛말에 ‘잘 입은 거지가 잘 얻어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사회생활 한편에 자리한 속성도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대접 받고 싶은 심리나 어떤 희망이 포함되어 있는 제스처겠다. 실제로 수수한 화장을 하는 심리는 내성적이고 수수한 사람이고, 눈 화장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인 것을 추구하며 타인 눈에 띄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재미있는 보고도 있다.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해소된다는 것은 삶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일차적 발원을 해결한 샘이 아닐까. 자고로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요. 소망이 있는 이는 행복 할지라.
오늘 내게 멋진 그대가 다가올지도…….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에세이 문예≫ 2014.9월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