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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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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바람입니다    
글쓴이 : 정진희    14-09-17 11:12    조회 : 13,438

는 바람입니다.

정진희

 

나는 바람입니다. 소리로 존재하는 나는 바다를 끌어안고 파도를 일으키며, 숲 우거진 계곡에서 바위를 만나 계곡물과 어울려 조잘대고, 때로는 대나무의 결기와 인고의 세월을 댓바람 소리로 전하기도 합니다. 교회 첨탑의 종소리를 불 꺼진 움막까지 실어다 주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숲속 가득 실어 나르며 밤 새 뒤척이는 개울물 소리에 기대어 함께 울 때도 있지요. 당신은 문득 누군가 당신 곁에서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적 없었나요? 내 손길이 닿는 빈 곳의 가락은 울음이 되거든요. 봄바람에 꽃잎이 비처럼 떨어질 때, 물기 하나 없는 낙엽이 발밑에서 부스스 부서져갈 때, 막연한 어느 겨울 밤, 가로등 아래 흰 눈만 흩어져 내릴 때, 그럴 땐 내가 당신을 찾아간 것이라는 걸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바람입니다. 누가 심지 않았어도 쑥쑥 자라나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 당신의 집 마당가에 핀 민들레도 내가 홀씨를 전해 준 것이지요. 병약한 당신이 지친 심신을 달래며 가꾸는 정원을 나는 지켜보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순환의 이치를 보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오래가지 않음에 고개 끄덕이는 당신과 나는 함께 있었답니다. 그러니 싹이 나고 풀잎을 눕게 하고 꽃대를 흔들며 당신의 창가에 풍경이 흔들리는 것도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한 내가 찾아간 것이지요.

 

나는 바람입니다. 머무는듯하지만 흐르지요. 흐르는 나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과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들 사이에 놓인 다리랍니다. 폭풍의 언덕에서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폭풍 같은 사랑일지라도 운명이 허락지 않은 사랑은 어긋났고, 어긋난 사랑은 기다리지 않아도 분노와 증오를 데려와 한 영혼을 파멸로 이끌었지요. 그 병든 영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캐서린의 영혼을 불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캐서린을 부르는 히스클리프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워더링 하이츠 저택 이층 창가에 캐서린을 데려다 주었습니다. 사랑이란 잃음으로써 오히려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에게 전할 수 있었다면.... 그러나 그렇게 목숨 건 지독한 사랑이 있어 아무도 함부로 사랑했단 말을 못하는 것 아닐까요.

나는 바람입니다. 흐르는듯하나 머물지요. 머무는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과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다림 사이에 놓인 그물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신발을 벗고 들어갔던 우즈 강가를 떠올립니다. 시대를 앞서간 한 여자를 집어 삼킨 강물 위에 우아한 자태로 노닐던 백조들과 그런 일일랑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듯 적막으로 둘러쳐진 곳에, 숨 막힐 것 같은 진공 속에 나는 있었지요. 그런 처참한 일을 보았던 내가 어찌 무슨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오직 침묵하며 기다릴 수밖에요. 그러나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꼭 슬프지만은 않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워한다는 것이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와의 추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녀가 몽크스 하우스 정원을 가로질러 이 강가까지 산책할 때면 그녀 주위로 번지던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공기를 잊을 수가 없답니다. 그녀의 체취가 남아있는 강가엔 삶의 비루함과 사랑의 덧없음과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애도가 여전히 깔려 있었지요. 하염없이 앉아 있던 당신도 내가 쳐놓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그물을 아마 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바람입니다. 내게도 다다를 수 없는 경지가 있고 이을 수 없는 인연이 있습니다. 서쪽 하늘을 고요하게 물들이는 노을이 그러합니다. 다가갈 수도 없고 흔들 수도 없으며 소리조차 흡수해 버리는 절대 고독의 존재. , 이 황홀한 비극이라니.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면 생은 얼마나 시시하겠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은 나를 절망하게 하고 때론 목 놓아 울게 하지만, 또한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열망과 고뇌의 시간들로 나를 키우나니...... 나는 욕망의 다리에도 묶이지 않고 무심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입니다. 세상 만물처럼, 당신과 그대들처럼, 그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뿐. 그러니 당신을 찾아 내가 오거든 먼 곳에서 전하는 소식에 귀 기울여 주시고, 내가 머물거든 내게도 숨 쉬기 힘든 아픔이 있다는 걸 알아주시고, 내가 가거든 나를 기억하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니 언제든 당신이 부르면 다시 달려 올, 나는 당신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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