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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출과 그리무    
글쓴이 : 강희진    12-05-04 10:34    조회 : 4,816
 
 공출과 그리무, 둘 다 일본식 표기다. 공출은 일제 파시즘이 나약한 조선을 강탈하여 태평양 전쟁으로 광분할 때, 우리 농민들이 애써 지은 쌀을 빼앗아 가던 명칭이 공출供出이다.
 요즈음은 공출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수매 또는 매상이라 하여 쌀을 정부가 사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아직도 어른들은 습관처럼 공출이란 단어를 쓴다. 나도 그렇게 부른다. 아마 농사꾼의 가치가 공출할 때나 지금이나 천하게 취급받아 그렇기도 하고, 쌀이 갖는 공적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매상을 나갈 때마다 쌀이 갖는 가치를 보상받으며 판다는 의미보다는 어쩐지 뺏기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공출 현장에는 예나 지금이나 단골로 나타나는 몇 가지 풍경이 벌어진다. 농투성이들의 헛싸움, 그 싸움 끄트머리에 웃음을 얹고 다가오는 정치꾼의 인사, 그 건성 인사 뒤에는 모닥불 앞에 널브러진 막걸리판 속의 비죽대는 농투성이, 그들 중에는 그리무를 판매하는 말솜씨 좋은 고니 아주머니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무야 노모가 계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화장품의 종류인 크림을 일본식 표기로 부르는 이름이다. 같은 일본식 표현이지만 그리무는 어쩐지 흙 심에 손등이 갈라지고, 갈 빛에 억세진 아주머니들 피부를 달래주던 정 익은 이름이다.
  아직도 우리 관내에는 크림을 이렇게 부르는 늙은 화장품 외판원 아주머니가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고니 아주매’라 부른다. 고니 아주머니는 공출 때마다 나타나는 단골 아주머니다. 면내를 돌아다니며 평생을 화장품 외판을 하면서 중매쟁이도 겸한 노련한 아주머니다.
  오늘은 우리 동네 매상하는 마지막 날이다. 동천에서도 벼 몇 가마가 헐벗은 등짝에 실려 나간다. 그러나 일 년 내내 땅과 함께 호흡했던 땀의 가치는 동천에 놔둔 채 간다. 그 가치의 귀함까지 가지고 간다면 복창이 터져 싸움판에라도 끼어들 것 같기 때문이다.
 매상 현장에는 늘 싸움판이 벌어진다. 그 싸움판은 멋모르고 귀한 가치까지 가지고 나온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성정性情은 놔둔 채 나락만 나간다. 성정性情이 없는 나락은 생명이 없는 것과 같다.
  점점 농민들은 생명이 없는 농산물을 만든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생명력이 없는 기계적 인간을 만들어 그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기계가 될 수 없듯이 쌀은 시장 속의 먹거리로만 가둘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나마 거지 찬밥 나누듯 인색하게 배정된 분량이지만 벼를 싣고 달린다. 경운기들은 주인 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달린다. 득재기 곰탱이 형, 장골 노인회장, 사쟁이 주포들, 줌방골 애늙은이 그리고 동네 어른인 장씨 할아버지는 팔순에도 손수 경운기 뒷덜미에 매달려 간다. 희망도 그들과 함께 간다. 늘 그렇다. 그러나 그 희망이란 놈은 겨우 느린 경운기 속도조차 쫓아가지 못한다. 겨우 그 정도 속도라니 !
  오늘은 특별히 옆 동네 막내 총각이 새로 산 중고 트럭을 이용하여 동네 일손을 던다. 그 청년이 장가를 가야 할 텐데, 그만 장가가면 이제 그 동네는 모두 가게 된다. 이제 마흔이 가까워진다.
 요즘은 동네 잔칫날이 있어도 칭얼대는 소리가 없다. 얼마 전까지도 잔칫날 과방 앞에서 알짱대던 꼬맹이들이 수능을 보더니 대처로 나갈 준비를 한단다.
  공출이 시작된다. 절망도 함께 시작된다. 등수가 매겨진다. 면서기는 매상 돈을 계산한다. 농협 서기는 이자를 떼고 잔금을 계산한다. 그러나 잔금이 없다.
  한쪽에서는 애꿎은 검사원에게 시비를 건다. 등급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올 날씨가 유난히 비가 잦아서 질 좋은 벼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떫거든 시지나 말지, 쌀값이 싸면 등급이라도 제대로 줘야지!
  장가 못 간 그 청년이다. 농협을 다녀오더니 부아가 뒤집힌 모양이다. 그는 아직 희망을 버리는 연습을 못한 까닭이다. 그 발악에서 아직 남아 있는 그의 희망을 본다. 그러나 울부짖음이 매우 처연하다.
  검사원은 대꾸도 안 한다. 늘 벌어지는 일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이제는 헛심 빠지는 싸움거리이다. 그의 울부짖음이야 이제는 가려울 때 긁지 않아도 자연히 가라앉는 부스러기 정도일 뿐이다. 이미 굳어진 울부짖음은 다만 허공 속에서 막대처럼 멈춰 있을 뿐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이라던가. 그 청년도 곧 절망을 안고 살아갈 거다. 절망을 안지 못하면 농촌에서는 버티기 어렵다. 절망 끝에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땅 위에 서야 비로소 농촌을 안을 수 있다. 또한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 했나. 그래야 절망의 끝에 새 삶을 이을 수 있다. 새롭게 만난 삶에는 장가를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후 그가 술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희망을 버린 사람들이 미리 와 있었다. 얼근한 채 취한 분위기도 농익은 동태찌개의 서린 김과 함께 무르익는다. 고된 하루를 잊어버리기에 안성맞춤한 분위기다.
  어느 탁자에선가 벌써 다방에서 차를 시켜 아가씨가 배달 와 있기도 하다. 특별히 겨울철을 대비한 젊은 아가씨다. 화제는 그 청년이었다. 잘했다는 거다. 술을 권하기도 하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 와중에 희망을 붙들고 싶은 바람이 권하는 술잔 위로 보인다.
  옆 상에서는 또 다른 희망을 붙들고 싶은 다방 아가씨가 뽕짝으로 한 자락 노래를 뽑는다. 다 같이 부른다. 그도 부른다. 따라 부르는 그의 구성진 가락 속에 서서히 놓아버리는 그의 희망도 보인다.
  노래 가락이 김 서린 사각 유리창을 넘어갈 무렵 누군가 슬쩍 노래에 묻어 들어온다. 늙은 고니 아줌마다. 자연스럽게 합석하더니 눈치 빠른 고니 아주머니가 청년 옆에 앉는다. 고니 아줌마가 은근히 그리무 한 개를 쑥 내밀어 청년의 허벅지 밑으로 슬쩍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어깨로 두어 번 툭툭 친다. 그 청년 귀에 속삭인다.
 “내가 중매할게. 지달려 봐”
 기어코 청년은 그리무를 사고 말았다. 그가 산 그리무가 그랬듯이 고니 아줌마의 속삭임이 한 겨울로 접어든 억세고 터진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고니 아줌마 말대로 내년 봄에는 그에게 축의금을 낼 수 있을까.

                                <한국 산문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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