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사랑
도심 한가운데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가 좋았다. 순백의 미사보에 대한 동경심도 있었다. 스무 살 초여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마음도 신록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다. 가슴 저 밑바닥까지 와 닿는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과 그레고리안 성가는 신비로웠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빛은 오묘했다. 신에의 갈망보다는 거룩한 분위기에 취했으리라.
역촌동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 산 아래에 서대문시립병원이 있다.
1979년 봄, 명동성당 소속 청년단체에 가입하여 한 달에 두 번 병원을 방문했다. 서대문시립병원은 중증 결핵이나 전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다. 3년간 입원할 수 있는 무료병동과 유료병동이 있고, 우리는 무료병동 환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어린 소년 소녀부터 노인들까지 옮겨지는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가족과 격리되어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그곳에 있을 수 있는 환자들은 혜택 받은 사람들이었다. 무료병동 환자들은 3년이 지나면 강제퇴원조치로 그곳을 나가야 했다. 병원으로 오르는 언덕길 옆에는 퇴원을 했으나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이 작은 굴을 파고 입구에 거적을 달아 살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수산시장 개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생선 비린내처럼 처참했고, 봄날 햇빛은 찬란해서 더 잔인했다.
시절이 어수선했던 1980년대 초, 내 마음은 끊이지 않는 시위로 몸살 앓는 명동성당처럼 혼란스러웠다. 나날이 풍요로워져 가는 경제사회 이면에는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시의 그늘 아래에, 산간벽지에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내 눈에 비친 삶의 단면은 더 이상 신록처럼 푸르지 않았고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거룩하지도 않았다. 여물지 않은 마음에 신의 존재와 고해 같은 삶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내 발 끝에 채인 돌에도 마음 아파했던 시절, 나는 감히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착각에 살고 있었다. 연민이 사랑인줄 알았다.
몇 년간 이어지던 병원방문은 한 소녀와의 헤어짐으로 끝을 맺었다. 하얀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과 겨울나무가지 같은 가녀린 팔을 가진 아이였다. 소녀는 유독 나를 따랐다. 가족을 떠나 홀로 투병하는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결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워 보였다. 창백한 피부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비워낸 해맑은 눈빛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그곳을 방문하는 몇 년 동안 그 아름답던 모습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창백한 모습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변하고 커다란 산소통을 의지 할 때쯤이면 그들은 타다 남은 장작처럼 스러져걌다. 그리고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은 병실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열일곱살의 숙경이도 그랬다. 하얀 붓꽃처럼 청초했던 그녀는 여름 지나고 가을이 되자 서서히 마른 꽃잎이 되어갔다. 창백한 뺨엔 검은 우물이 자리잡고 물기 잃은 눈에서 별이 스러져갔다. 초겨울이 다가오고 그녀의 방에도 산소통이 들어섰다.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녀와의 만남에 아픈 마음보다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도, 알 수 없는 그녀의 내일도 두려웠다. 내게 의지하고 위안 받고 싶어 하는 그녀에 대한 부담감이 커져갔다.
핑계거리를 찾아 방문하지 않는 날이 생겼다. 그녀가 나를 많이 기다리더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희고 긴 목은 더욱 길어져 곧 부러질 것 같더라고 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웃어줄 자신이 내겐 없었다. 어떤 희망의 말도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두려움은 공포가 되어갔다. 핑계는 늘어가고 그녀를 찾지 않은 날이 점점 길어져 갔다. 주일이면 몸은 성당에 머물지만 죄책감은 그녀 곁을 맴돌았다.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그녀가 이 세상의 꽃이 아님을 전해 들었다. 그녀를 찾지 않은지 두 달이 채 못 되어서였다. 작별인사 없이 그녀를 보냈다. 기다림에 길들여 놓고 그녀의 그리움은 채워주지 못했다. 거짓된 사랑이 어린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외롭게 떠나가게 했다. 나의 착각으로 시작된 소외된 이들과의 만남은 죄책감과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서대문시립병원도 다른 요양원도 다시는 찾지 못했다. 봉사라는 위선을 탈을 쓴 내가 비로소 보였다.
한해를 마감할 즈음이면 먼 곳에서 아이들의 사진과 편지가 온다. 나와 가느다란 인연의 끈을 마주잡고 있는 아이들이다. 제 나이보다 많이 작았던 아이가 몇 년 새 성큼 자라 이제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 몸이 약해 늘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아이도, 병든 아버지를 따라 구호단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는 아이도 있다. 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 상처 입힐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었다. 한 소녀를 외롭게 떠나보낸 죄책감은 긴 시간 상처로 남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기억의 갈피에 묻혀 있는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가끔씩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 옛날 나와 함께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 다시 시작하라고 말한다. 나도 그런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한국산문 2013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