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
박태원(법문)
1 .심층 심리에 의한 암호 해독
현재의 나는 무엇인가?
定의 존재인가, 不定의 존재인가
맷돌은 돌아가나 중심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의 의식은 다층 구조로 되어있다. 마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여 의식하는 나를 놓으면 본성과 계합하여 활연관통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부동이며 작용하지 않는데 사람이 신에게 다가 간다고 하였다. 定이면 신이요 不定이면 사람이다. 서양의 철학은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사유했지만, 동양의 철학은 이분법으로 분리하지 않았다. 人乃天인 것이다. 맷돌을 마음껏 돌리되 다만 중심축은 건드리지 마라. 이것이 동양禪의 요결이다.
세계 평화의 도리는 동양에 있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 회광반조(回光反照)하고 심의식을 투과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곳에 세계 평화의 열쇠가 있다.
시심은 천심이다. 시인의 마을에는 평화의 향기가 피어 오른다.
시는 천재 또는 영감에 의하여 쓰여지는가 아니면 숙련된 의식적인 작업에 의해서 쓰여지는가, 시를 쓰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심층심리를 얼마나 투과했느냐에 달려있다. 고요하고 적적한 정신상태에서 좋은 시가 창작된다.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비극과 서사시를 연구하여 모범적인 비평이론서인 시학을 저술하였는데 숭고한 시가 갖추고 있는 문장의 기술적인 요소를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인생사를 모방 또는 재현하여야 독자와 관객에게 감동과 쾌감과 숭고한 미를 전달하는가에 대하여 플롯과 성격, 사상과 조사(措辭), 장경(章景)과 노래를 제시한다. 이중 플롯을 비중있게 서술하고 있다. 당시에는 문학의 쟝르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작시술(作詩術)의 보편적인 내용이라 할 것이다.(‘시학’ 아르스토텔레스 저 천병희 옮김 참조)
현대시의 특징은 무엇인가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시의 형식과 내용도 변화해 왔는데 현대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이다. 앙투앙 콩파뇽은 현대의 관점에서 모던니즘의 아이러니를 분석하였다. 모더니즘은 새로운 것에 대한 미신, 미래에 대한 종교, 이론에 대한 집착, 대중문화에 대한 호소, 부정의 열정이라는 면에서 현대적 전통을 하나의 궁지에서 다른 궁지로 오가며 스스로를 배신했다고 주장한다.(‘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 앙투앙 콩파뇽 저 이재룡 옮김 참조)
에드워드 사이드는 부정한 권력을 통해 지배하려는 모든 종류의 억압을 극복하고 분리와 배제가 아닌 상생과 공존의 관계를 지향하는 통합과 포용의 세계를 제시하는 탈식민주의 이론을 주장한다. 그것은 수직적 이분법을 해체한 문화적 차이의 증식과 전이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제3의 공간, 열린 공간이며 다양한 차이를 포월(抱越)하는 경험의 시간이다. 이는 서구의 형이상학 철학이 생산한 자아 중심적인 도구적 근대를 부정하고, 타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탈식민 현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생산한다. 현대는 다중(多衆)의 시대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기존의 인민.민중.대중은 권력의 억압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 아니라 아주 쉽게 조정되어서, 인민의 힘을 빌린 공산주의 독재나 ‘대중 독재’ 형식으로 권력화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했지만, ‘다중’은 능동적인 자율성과 다수성을 지니기 때문에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세계화된 자본주의 제국의 권력의 양식에 저항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경험의 총체적 인식과 객관적 재현, 합리주의, 보편주의, 개인주체, 과학적 이성과 진보주의, 서구.백인.남성중심주의, 고급문화의 권위주의, 매체와 장르에 대한 위계의식 등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며 규정적인 파악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듦으로써 인간의 삶과 진실을 좀 더 유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식이 모색되고 시도되고 있다.
(‘21세기 문예이론’ 김성곤 편저 참조)
2. 詩의 風格 ?風.骨.采
유협(425~520)은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작품이 이상적인 풍격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장에 풍(風).골(骨).채(采)의 3요소가 내용과 형식으로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풍골만이 구비되고 수식이 결여된 작품은 매처럼 높이 날 수 있으나 아름답지 못하고, 화려한 수식만 있고 풍골이 결핍된 작품은 살찐 꿩과 같아서 화려하지만 높이 날지 못하며, 풍골과 아름다운 수식이 겸비된 작품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하늘 높이 비상할 수 있는 봉황과 같다고 하였다.
유협은 문예작품이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생명력을 외면화한 것이라고 보았고, 감정이 뚜렷이 드러난 감화적인 작품에서 풍격을 찾았다. 풍(風)이란 작품의 기세와 감동력인 것이며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고 생명력이다. 골(骨)이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문자를 의미의 맥이 조리있게 흐르도록 배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작품의 체계(짜임새)와 구성의 긴밀성, 그리고 이로부터 감지되는 표현력이다. 채(采)는 언어문자를 예술적으로 운용하여 아름답게 다듬어 꾸밈으로써 드러나는 수식의 미감, 즉 작품의 형상적인 미감이다.
유협은 작품 구성에서 풍.골.채의 3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서 내용과 형식이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아려(雅麗)’의 이상적인 풍격이 달성된다고 보았다.
유협은 아려한 문장의 모범을 성인의 경전으로 보았다. 경전을 규범으로 삼아 문장을 지으면 얻게 되는 여섯 가지 예술효과가 있는데 이를 종경육의(宗經六義)라 한다.
첫째, 감정이 깊고 거짓이 없다. 둘째, 작품의 감동이 순수하여 잡다하지 않다. 셋째, 인용한 사실들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다. 넷째, 사용된 의미가 정확하고 왜곡되지 않는다. 다섯째, 체제가 정련되어 번잡하지 않다. 여섯째, 문사가 화려하면서도 지나치지 않다.
3. 시의 예술성에 관하여
예술이란 문학.음악.미술을 포괄하면서 식정(識情)의 심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자성(自性)의 창조 활동이다. 역으로 말하면 예술 활동이란 식정(識情)을 심미적으로 관조하여 자성(自性)를 깨닫고 표현하는 작업이다.
詩는 언어로 표현하되 음악적인 리듬과 회화적인 이미지를 심도있게 형상화 한다. 詩語는 일상어와 다르지 않으나 용법에 있어서 지시적이고 개념적인 관습적 사용을 거부하고, 정서적이며 함축성을 내포하는 자연적인 언어이다. 즉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적 언어이며 진실한 감정의 언어이다.
詩는 유기적인 구조이며 자율적인 총체이기에 詩語는 전체적인 구조와 문맥 속에 놓일 때 의미가 형성된다. 시어는 이미지.상징.은유.리듬.아이러니 등 언어의 국면들과 관련하여 신중히 선택되고 긴밀하게 조직되어 정서적 상상적 반응을 일으키고, 심미적인 공감과 심도깊은 감동을 환기시킨다.
4. 발자국마다 꽃향기 흩날리고
세종대왕의 어진 신하였던 강희안(姜希顔)은 부지돈령(副知敦寧)의 한직(閑職)을 제수받아, 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화암(花庵)을 짓고 백여 그루의 화초를 기르며 속세를 잊었다. 그는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稱함을 받았다. 그는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에서 노송.오반죽(烏班竹).국화.매화.난초.연화(蓮花).석창포 등의 화초를 양생(養生)하는 법을 밝혀 놓았다. 화초의 천성과 배양하는 이치, 거두어 들이는 법을 알아야 하며, 건습과 한난을 알맞게 맞추지 못하고 그 천성을 어기면 반드시 시들고 만다. 하챦은 식물을 양생하는 천지조화의 이치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으니, 어찌 그 마음을 애타게 하고 그 몸을 괴롭혀 천성을 어기고 해치겠는가!
[청천자(菁川子)가 하루는, 저녁에 뜰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흙을 파고 꽃나무를 심는데 피로도 잊고 열중하고 있었다. 손이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이 꽃을 기름에 양생하는 법을 알았다 하였음을 내가 이미 들어 알거니와 이제 체력을 수고롭게 하여 마음과 눈을 미혹시켜 외물(外物)의 끌림이 되었음은 어떻다 생각하시오? 마음이 쏠려가는 것을 뜻(志)이라 하였은즉 당신의 뜻이 빼앗겨 잃지 않았오?” 청천자 대답하되 “ 답답하구려! 참으로 당신 말과 같다면 몸뚱이를 고목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쑥대처럼 버려두어야 잘했다 하겠구려? 내 보건데 천지간에 가득히 차있는 만물들이 힘차게 자라고 씩씩하게 이어가며 저마다 현묘한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오. 그 이치를 진실로 연구하지 않고는 또한 알지 못하오. 그러므로 비록 한 포기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라 할지라도 마땅히 그것들이 지닌 이치를 생각하여 그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서 그 앎을 두루 미치지 아니함이 없고 그 마음을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되면 나의 마음이 자연히 만물에 머물지 않고 만물의 밖에 뛰어넘어 있을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잃음이 있으리오? 또 사물을 관찰하는 자는 몸을 닦고, 앎에 이르고, 뜻이 성실해야 함은 옛사람이 일찍부터 말하지 않았었소? 이제 저 창관대부(蒼官大夫:松)의 의롭고 굳건한 의지는 홀로 천훼백목(千卉百木:卉-풀훼)의 위에 솟아 있음은 이미 말할 나위가 아니오. 그 나머지 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