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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의 다리    
글쓴이 : 유영석    24-12-13 09:07    조회 : 1,668

약속의 다리

유영석

 

인생은 약속의 연속이다. 누구나 약속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건너간다. 약속은 단순히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아니다. 그건 나와 상대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징검다리다. 고리가 엉키고 다리가 부실하면 이음매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약속은 또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겠다고 스스로에게 손가락을 거는 다짐이다.

40년 전이다. 을지로의 커피숍에서 국립의료원 간호사인 한 여인을 만났다. 말수가 적은 나와 다소곳한 그녀는 말보다 눈빛으로 속내를 주고받았다. 강원도 출신의 순박한 모습에 마음이 끌렸고, 그녀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데 몇 번의 만남에서 내 이마에는 지각 대장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렸다. 삼성물산 경리과에서 일하면서 일상이 된 야근으로 약속 시간을 자주 어긴 탓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30분 넘게 기다리다 지쳐 그냥 나가려는데 커피숍 주인이 지난번에 가신 다음에 그 남자분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라고 해서 내가 올 거라 믿고 다시 자리에 앉은 적도 있다고 했다. 늦을 때마다 일 때문인 건 이해하지만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 아녜요?”라는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한편 미안하면서도 낯빛 바꾸지 않고 기다려줘 고마웠다. 서로의 일터가 있는 태평로와 을지로를 오가며 그해 11월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아내는 가끔 데이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농담조로 말을 던진다. “못 믿으면 못 살지.” 듣는 나는 해석이 좀 헷갈린다. 지각 대장이던 나를 믿고 기다렸다는 말인지, 부부로 살면서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는데 억지로 믿으며 살고 있다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남편인 나의 약속에 불신이 묻어 있는 듯해 마음 한켠이 씁쓸하다. 말만 번지르르한 공수표를 남발한 것은 아닌지도 돌아본다. 이제라도 아내와의 약속을 천금처럼 여기리라. 약속은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가족의 울타리를 지탱하는 기둥이니.

당신도 이제부터는 영혼을 돌봐야 하지 않겠어요?”

정년퇴임한 내게 아내는 영혼이라는 말을 툭 던졌다.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해야겠지.”라고 답했고, 아내는 영혼을 돌보는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건 다름 아닌 성경 필사였다. 다음날 아내는 다니는 교회에서 시리즈로 만든 성경 필사 노트를 내게 건네주었다. 어차피 인생의 뒷부분을 글로 채우기로 스스로 약속한 터였다. 시대의 작가들도 글쓰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스토리와 비유, 역사가 있는 성경을 읽으라 하지 않았던가. 믿음을 단단히 하고 글쓰기 소양도 채울 겸 성경 필사를 약속했다. 그것은 아내와의 약속이자 내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필사 노트에는 성경이 없어도 쉽게 베껴 쓸 수 있도록 바둑판 모양의 종이 바닥에 말씀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루에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꼬박꼬박 써 내려갔다. 성경 필사는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이었다. 아내의 처방전은 가히 명의 급이었다.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는 가슴에 무언가 울림을 주었고, 울림이 커지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듯한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필사 노트를 보는 아내의 표정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초심은 자주 길을 잃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경 필사 의지가 약해지고 현실의 유혹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마태복음까지 필사를 계속하다가 이런저런 핑계로 한동안 펜을 놓았다. 속세의 어둠 속에서 마음이 출렁이는 나 자신을 꾸짖었다. ‘아내와 내게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는가?’ 길이 꼬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 한다. 마음과 발길을 원점으로 돌려 다시 필사를 시작했다. 성경 필사로 믿음이 깊어졌다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삶의 지혜를 얻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사실은 지금도 나를 뿌듯하게 한다.

20대 후반의 내 인생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집안 형편상 상고를 나와 일찍 직장에 발을 들여놓았고, 한국방송통신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척박했다. 회사의 바쁜 업무로 기진맥진한 몸은 강의를 견뎌내지 못했고, 1년쯤 다니다 휴학했다. 장인은 사위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고 학위를 취득하라.”고 격려해 주었고, 나는 꼭 그리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장인과의 약속을 이행하기까지는 무려 15년이 걸렸다. 결혼 이후 10여 년간 오사카와 도쿄를 오가며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중간에 방송통신대에 확인해 보니 제적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무역학과로 편입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새천년을 맞이한 2000년에 학위를 취득했다. 천신만고 끝의 값진 열매였다. 장인의 격려에 사위가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흐지부지될 수도 있는 길이었다. 약속은 신뢰의 근본이다.

누구나 약속의 다리를 건너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나 또한 약속의 다리를 수없이 건너 여기까지 왔다. 시간을 잘 지키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은 번번이 어겼지만, 이해심 덕분에 부부 연을 맺었다. 성경 필사라는 자신과의 약속은 중간에 길을 잃기도 했지만,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장인과의 약속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다리가 되었고, 나는 그 다리를 건너 꿈꾸는 세상으로 나왔다. 약속은 다리다. 나와 너를 맺어주는 다리,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는 다리,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다.

가장 아름다운 말은 약속이고 가장 슬픈 말 또한 약속이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은 약속의 양면성을 함의한다. 신뢰의 향기가 피어나는 말이 있고,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말도 있다. 노자는 믿음직한 말은 꾸밈이 없고 화려한 말은 믿음이 적다.”라고 했다. 음식은 담백한 맛이 으뜸이고 말은 진실할수록 치레가 적다.

해가 점차 서산으로 기울어간다. 내 말의 신뢰는 얼마나 견고할까. 허공으로 날린 약속은 얼마나 될까. 겉은 화려한데 속엔 쭉정이만 가득하지는 않을까. 답이 모호한 궁금증이 어지러이 머리를 맴돈다. 약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시간을 잘 지키겠다는 아내와의 약속, 성경 필사라는 나와의 약속 또한 아직도 미완성이다.

오늘 문득 발걸음이 40여 년 전 을지로의 그 커피숍으로 향한다. 내가 늦더라도 그녀가 그 자리에 앉아있기를. 초심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기를. 그곳에서 오간 약속이 세월에 빛바래지 않기를···.



『한국디지털문인협회 6호 문집』 - '내 인생 최고의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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