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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세번 만에    
글쓴이 : 곽지원    26-07-15 08:44    조회 : 237

삼세 번 만에

곽지원

 

20138, 큰딸의 대학 기숙사 입소를 돕고 학부모 오리엔테이션도 참가하기 위해 처음 함께 왔던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인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산불 피해 때문에 당분간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큰애의 졸업식 때에도 역시나 짧은 일정이어서, 요세미티는 그야말로 요원했다. 그때 이후로 우리 네 식구가 함께 해외여행을 간 적이 없으니,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토니 베넷, 1961)를 들을 때면 나의 마음은 어느덧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퇴직 여행으로 미국에 사는 큰딸에게 혼자 찾아가기 전 미리 계획했던 12일의 요세미티 일정. 전날 딸의 생일을 몇 년 만에 함께 보내고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묵었다. 보름 전 내린 눈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최고 기온이 28도를 웃도는 5월 중순의 날씨. 백팩에 두툼한 후드 티 대신 반팔을 넣은 자신을 칭찬했다. 오클랜드에 사는 큰딸과 함께 최초의 모녀 여행으로 다녀온 요세미티는, 거대하지만 아기자기하고 평화롭지만 불끈불끈 반전 매력이 넘쳤다.

 

국립공원 간판이 크게 자리 잡은 입구에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 사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철 막대가 눈에 띄었다. 바닥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철 막대에, 막 주차한 트럭에서 내린 젊은 엄마와 대여섯 살로 보이는 소녀가 새로운 스티커를 붙였다.

여기에 왜 스티커를 붙이는 건가요?” 하고 물으니,

, 전국에 있는 63개 국립공원 입구에 이런 막대가 다 있어요. 방문하는 곳마다 기념으로 스티커를 붙이고, 내 흔적을 남기는 거랍니다.”라는 친절한 설명이 돌아왔다.

 

링컨 대통령에 의해 미국 최초의 주립공원으로 선포되었고, 현재 그랜드 캐니언, 옐로 스톤과 함께 미국 3대 국립공원으로 꼽히는 요세미티. 캡틴 아이크의 요세미티 500회 가이드 경력과 해박한 지식 덕분에, 몇몇 장소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날씨가 안 좋으면 절대 개방하지 않는다는 글래시어 포인트’(Glacier Point)를 갈 수 있으니 행운이라며 두 눈을 반짝이던 캡틴. 그때까지만 해도 글래시어 포인트가 그렇게 좋은 데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높은 고도에서 장엄한 시에라 산맥과 요세미티 밸리를 한눈에 내려다보니, 가슴이 뻥 뚫렸다. 노스페이스의 로고로 유명한 하프 돔’(Half Dome)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물론 하프 돔은 저 아래 밸리나 머세드(Merced) 강가에서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글래시어 포인트에서 느끼는 웅장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맥북 바탕화면으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화강암 바위 엘카피탄’(El Capitan). 망원경으로도 거기 매달린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다. 거대하다, 웅장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묘사가 안 되는 규모의 바위산, 아니 바위 절벽이다. 왜 전 세계 암벽 등반가들이 몰려드는 성지인지, 한눈에 이해되는 장관이었다.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엘카피탄 아래로 흐르는 강물에 발가락 끝만 넣었는데도 찌릿찌릿, 얼음 같은 차가움이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두 발을 다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다. 아침 8시에 출발하느라 쌓인 여독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눈이 녹으면서 쏟아지는 면사포 폭포’(Bridal Veil Falls)는 새 신부의 면사포처럼 주변을 신비롭게 감싸는 물안개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무지개로 유명하다. 카메라에 흐릿하게라도 그 무지개를 담으려고, 머리카락과 얼굴에 달라붙는 물방울과 싸웠다. 더위로 처졌던 몸이 샤워한 것처럼 개운했다.

 

120번 고속도로를 타고 요세미티로 들어갈 때 마지막 타운이라는 그로브 랜드에는 투어 팀의 숙소가 있었다. 조용한 동네지만 널찍한 잔디 마당의 가장자리로 작은 개울이 흘렀고, 뒷마당에는 앙증맞은 나무다리까지 있었다. 이런 데서는 평생 살아도 질리지 않고 행복할 것 같았다.

캡틴이 수비드로 만든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여행객들이 각자 사 온 맥주와 와인으로 푸짐한 저녁이 차려졌다. 한국이 정말 좁다는 걸 지연地緣으로 다시 확인하고, 딸아이가 모두의 MBTI를 단박에 맞추는 재주를 선보이는 등 시끌벅적 수다를 떠는 사이, 밤이 깊어 갔다.

다음 날 아침, 창밖에는 사슴 가족이 외출을 나와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다. 언제 또 사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겠는가. 도망갈 새라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렸다. 몇몇은 집 밖으로 나가서 사슴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침 메뉴인 떡국이 압력 밥솥에서 끓는 동안 거실 벽난로에서는 따스한 불꽃이 타올랐고, 그 앞에 앉아서 커피로 잠을 깨웠다.

 

둘째 날은 투오룸네 그로브’(Tuolumne Grove) 하이킹이 예고되어 있다. 트레일 곳곳에서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엘카피탄에 이어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알겠다. 바위가 많은 지형 탓에 뿌리가 땅속 깊이 자라지 못하는 환경. 그래서 뿌리째 뽑혀 누워있는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나무 안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린 하이킹 코스에는 번개 맞은 나무들의 희한한 자태가 눈길을 사로잡았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초대형 솔방울이 굴러다녔다. 도그우드(Dogwood) 꽃나무도 많이 보였는데, 향기 없는 꽃이라고 한다. 대신 새하얀 이파리가 꽃처럼 눈부시고, 고운 자태로 벌을 유혹한다.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요세미티 폭포는 전날 보았던 면사포 폭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냈다. 그 높이도 높이지만, 눈이 녹아서 내리는 거라고 믿기 힘들 만큼 물줄기의 파워가 압도적이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전, 1시간 30분 정도 개인 시간이 주어졌다. 캡틴이 나눠준 돗자리를 들고, 딸과 나는 머세드 강가를 찾았다.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랐지만, 어느 젊은 커플은 풀 위에 바로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포장해 온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카약 두 대가 유유히 지나갔다. 노 젓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로웠다. 돗자리 위에 누웠다.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선명한 하늘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그 사이로 수줍게 반짝이는 오후의 햇살. 천국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요세미티는 그렇게 내 마음에 도장을 쾅 찍으며 자리 잡았다. 처음 오는 데 11년이나 걸렸지만, 삼세 번 만에 이룬 버킷 리스트이지만, 다시 올 때는 그렇게 뜸 들이지 않으리.

요세미티여, 기다려라. 내가 또 찾아올 테니.

 

* [한국산문] 25년 9월호에 '요세미티, 반전 매력이 넘치는 국립공원'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글을

[뉴욕일보] '수필의 향기' 코너 청탁을 받고 제목과 내용을 수정해서 실음(26년 7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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