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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글쓴이 : 이우중    15-06-11 20:38    조회 : 6,266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우중

 

2009년 회사 분위기는 을시년 스러웠다.

어려운 경영사정으로 지사별로 명예퇴직 인원이 배정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강남지사는 폭풍전야로 빠져들었다. 누가 나가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누구는 상가가 몇 채 있어서, 누구는 10억대 강남 아파트 두 채가 있어서, 누구는 아내가 고위직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이 보장되어서……

남자직원 누군가 회식자리에서 회사 때려 쳐도 먹고 살만하다고 허풍떤 이야기도 기억해냈다. 아무도 이런 상황은 상상을 못했다. 남자직원들은 회사가 잘나갈 때 술에 취해 으시대기 위해 하였던 말들이 이제 자신을 옥죄는 정보가 되어 돌아왔다.

여직원들은 허풍쟁이가 아니었다. 실속이 없는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뒤가 켕길게 거의 없었다. 여직원들은 이때다 싶어 자신이 회사에 남아야 할 이유도 넌지시 끼워 소문을 냈다. 평소에는 괴로워 함부로 까발리고 싶지 않았던 집안 사정 이야기였다. 둘째 녀석이 이번에 삼수 중이어서, 남편이 주식하다 억대의 빚을 져서, 지금 사는 집이 사실은 자가가 아니어서……

결국 남이 나가야 할 이유만큼이나 자신이 남아야 할 이유도 많았다.

나는 생각했다. 재직 연수도 많고 연봉도 많이 받고 있었다. 또한 당해 직급에 오래 있어서 객관적으로 따져볼 때 나가야할 요소가 많았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회사 분위기를 전했다. 남아 있을 이유보다 나가야할 이유를 강조했다. 직원들의 어려운 처지를 과장했다. 그래도 우리 집 사정이 그들보다는 조금 좋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명예퇴직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나는 팀장으로서 팀원들과 마주 않아 말없이 지나간 과거를 회상했다. 아마 그들도 과거를 추억했으리라!

여직원 딸 돌잔치에 모두 몰려가서 내 일처럼 축하해 주었던 일, MT때 한탄강에서 급물살을 타고 리프팅을 하다 강물에 빠진 동료에게 손을 내밀어 구출한 일, 봄 체육대회 충북 월악산 정상에서 다리에 쥐가 나고 탈진한 동료를 여러 직원이 번갈아 가며 어깨동무로 메고 내려온 일, 우리 팀이 우수 팀으로 선정되어 상금 2천만 원으로 금 네 돈 씩 금 돼지를 만들어 나누어 가졌는데 일 년 만에 금값이 네 배나 뛰었던 일, 또한 여직원 세 살짜리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상가에 찾아가 모두가 눈물 흘린 일 등등 즐겁고 슬픈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동거동락(同居同樂) 하였고 친형제 같았다.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동료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명예퇴직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운명의 갈림길, 여직원들은 막판까지 줄다리기에서 당찼다. 그들은 떳떳하게 남아 있어야할 이유를 호소력 있게 설파했다. 그 결과 삼십 여명이 떠나는 데에 여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나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정년퇴직 5년을 남겨두고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떠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명예퇴직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내와 딸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당시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온 후 대학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3학년 복학을 미루고 해외 어학연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소 나와 아들은 내성적이고 수세적이었으나. 반대로 아내와 딸은 외향적이며 진취적이었다. 아들은 가장의 퇴직에 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돈을 아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딸과 아내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 하였다.

35년간의 회사 생활이었던 만큼 명예퇴직 후 한동안 여러 곳에서 송별식을 해주었다. 나는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에 회식장소로 나갔다. 그렇게 1월이 가고 2월이 왔다. 2월에는 그 많던 송별회식도 바닥이 났다. 습관처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또 잠을 잤다.

2월 중순 아침을 먹고 자고 있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설거지 하는 소리가 귀에 조금 거슬렸다. 못들은 척 하고 또 잠을 청했다. 다음날 그릇이 심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셋째 날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커졌다. 신경이 쓰였으나 또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그리고 며칠 후 그릇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일단 시에서 운영하는 시립도서관으로 몸을 피했다. 2월 말부터 3월 초순까지 매일 도서관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잠을 잤다.

도서관에서 잠에 지친 나는 심심풀이 겸 15년 전 취미로 쓴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로 수량을 조절 하였다. 나의 첫 번째 장편 소설 신은 한국을 선택했다를 출판했다. 소설가로의 데뷔작은 8천부가 팔렸음에도 거창한 출판 기념행사 등으로 수지타산에서 실패했다.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찾았다. 그리고 친구가 사장인 조그만 벤처기업에 사정사정해 겨우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아들은 일 년 계약으로 나가 있던 해외어학연수를 집안의 어려움을 핑계로 2개월 반 만에 자진 포기하고 귀국, 집에서 빈둥대며 놀았다.

아내는 몇 년 전에 취득한 요양보호사 자격증으로 노인요양원에 취직해서 돈을 벌었다. 딸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영어 실력을 밑천으로 용산 보광동에 공부방을 열었다. 일 년 후 딸은 아내와 뭔가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아내가 딸한테 뒷돈을 꾸어 주는 것 같았다. 그즈음 딸은 자신의 공부방 학생들을 데리고 30명 규모의 보충수업 학원을 창업했다. 그 후 2년 동안 아내는 딸 학원에 수시로 들락거리더니 용산에서는 제일 큰 강의실 12개가 있는 탑패스 학원을 인수하고 아들까지 영어강사로 데려 갔다.

그동안 세상은 바뀌어 신임 검사 비율에서 여자가 남자를 앞질렀고 대통령도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딸은 원장으로, 아내는 회계담당으로, 아들은 시간강사로 용산 학원에 출근했다. 우리 집이 내 직장이 있는 죽전과 가까운 성남 분당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나는 딸과 아내의 눈치를 보다가 자진해서 이주를 결정했다. 20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인 성남 분당에서 가재도구를 챙겼다. 이삿짐 을 싣고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한강을 건너 한남동 옆 딸과 아내가 주인인 학원 100미터 앞으로 이사 했다.

그 후 학원은 더욱 커져 학생 수가 60명에서 130명으로 늘어났다. 우리 집의 주요수입은 대부분 딸과 아내가 벌어들였다. 나와 아들은 몸을 도사리며 딸과 아내의 기분을 맞추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이사 후 딸과 아내의 발언권은 강화되었다. 외식 장소와 외식 메뉴는 딸과 아내의 의견비중이 많이 반영되었고 나와 아들의 의견은 축소되거나 배제, 혹은 무시되었다. 명예퇴직 전 외식은 주로 나와 아들의 분위기인 제주똥돼지오겹살이나 판교 털보 수타짬뽕이었는데 이사 후에는 딸 취향에 맞게 이태원 프랑스 달팽이 요리전문점또는 터키 양고기 케밥집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더하여 아들은 시간제 영어강사 외에도 한밤중에 학원 선전지를 불법으로 전봇대에 붙여야 했다. 나의 처지는 더욱 처참했다. 친구가 하는 벤처기업이 경영이 악화되거나 또는 나이가 더 먹을수록 퇴출을 걱정해야 했다. 대책이 안 섰다. 대책이 안 설수록 딸과 아내 몰래 학원의 경영상황을 은밀히 체크하고 몸을 낮추며, 아내와 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야한다고 다짐했다. 멀지않은 미래에 학원 버스 운전기사 자리라도 노려야 하는 처지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오늘도 직장이 있는 남()경기지역에서 축 처진 어깨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강북으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서쪽의 뚝뚝 떨어지는 해와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쓸쓸히 집으로 향했다



2015년 <시와 에세이 >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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