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장 은 아
어릴 적 겨울철에 해가 질 무렵이면 엄마는 나더러 옥상에 널린 빨래를 걷어오라고 하셨다. 사방이 어둑해진 옥상은 우리 집인데도 마치 낯선 다른 동네인양 서먹한 느낌이 들었다. 스산한 산그늘을 뒤로하고 늘어진 빨랫줄에는 스웨터며 바지며 내복 같은 식구들의 일상이 그대로 빨래로 널려있었다. 나는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은 빨래들을 빨랫줄에서 떼어내면서, 나의 빨간 스웨터 끝에 매달린 고드름에 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를 갖다 대었다.
눈물처럼 고드름이 매달린 얼어붙은 내 빨간 스웨터에 나의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젖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른 것도 아닌 채, 뻐걱뻐걱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는 스웨터가 깡통 로봇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없이 시리고 서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드름 놀이에 시간을 지체한 나는 허둥허둥 빨랫줄에서 덜 마른 빨래를 걷어 내리고 나서 옥상을 내려오려다가 아까보다 훨씬 더 어두워진 빈 옥상에 빨래도 없이 빈 몸으로 남아 겨울밤을 보내게 될 빨래집개들의 슬픔들을 보아버렸다.
나는 차마, 내가 빨래를 걷어낸 빈 자리에 앙다문 입으로 빨랫줄을 물고 매달린 그것들을 옥상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내려올 수가 없었다. 나는 왜 그것들이 마치 눈 쌓인 추운 겨울 덕장에 매달린 채 퀭한 눈으로 먼 바다를 그리워하는 명태처럼 서러워 보였을까.
아직 스웨터나 빨래 끝을 물고 있는 빨래집개 한두 개를 짐짓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어 빨래에 붙어 있는 채로 집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도, 아직 덜 마른 빨래들을 따뜻한 방안에 펼쳐서 마저 말릴 때 빨래자락에 딸려 들어온 눈이 퀭한 빨래집개들의 꽁꽁 언 몸을 함께 녹여주었던 것도, 내가 그것들의 말 못하는 쓸쓸함을 보아버렸던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에게는 겨울철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 아직 빨랫줄에 매달린 빨래집개들이 약간은 외롭고 시린 기억이다. 그 후로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 때 이후로 쓸쓸함을 감지하는 촉이 유난히 발달한 것인지, 무심히 부딪치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말 못하는 쓸쓸함을 문득문득 몸으로 느낀다.
오늘따라 곤한 하루를 보냈던지 남편은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다. 밀린 일을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에 앉아 있는 내 등 뒤에서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한다. 몸을 돌려 가만히 그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니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그가 보낸 하루는 어떠했기에…. 그는 꿈속에조차 곤한 것일까.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뻗어 그의 미간에 얹힌 주름진 하루를 털어 내준다.
젊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알고, 패기만 있으면 되는 줄 알고, 그것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살아도 실패만 거듭할 수 있다는 것을 살면서 알았다. 아이들 크기 전에 보란 듯이 성공해서 사람들 앞에 서고 싶었지만 성공은 맛도 못 본 채 아이들은 어느새 다 자랐다. 아이들만 자랐을까 나도 어느덧 반백 년을 살았다. 미워해 보기도 하고 원망해 보기도 했지만 문득 나이 들어 잠들어있는 남편의 모습에 울컥 가슴이 아프다. 보나마다 힘겨운 하루를 보냈을 터였다. 계산기 두드리며 힘든 줄도 모르고 동동거리며 하루를 보냈겠지.
허구한 날 내 청춘 앗아가 버린 날강도 취급하며 괜한 억지소리를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를까. 내 청춘이 사그라지는 동안 그의 청춘도 스러져가고 있었다는 걸. 한때 그에게도 출렁이는 바다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겠지. 하루하루, 이를 앙다물고 하루하루 빨랫줄 같은 현실 매달려 사느라 점점 그의 바다에서 멀어져 갔겠지. 출렁이는 바다를 꿈꾸며 덕장에 매달린 명태처럼, 그렇게 온 몸으로 시린 세파를 견뎌왔겠지. 사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돌아보면 서럽지 않은 인생 없고, 돌아보면 쓸쓸하지 않은 사람 없다. 그렇게 사는 거지. 서로 몸 부대껴, 시리고 아픈 마음 보듬으며 덕장에 매달린 겨울 명태처럼, 해가 떨어지고 빈 빨랫줄에 매달린 빨래집개처럼. 사람은 너, 나 없이 누구나 다 쓸쓸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