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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출미학(貸出美學)    
글쓴이 : 백두현    16-05-20 13:41    조회 : 6,439

대출미학(貸出美學)

                                                                                백두현  

그날따라 아침부터 아내가 부산했다. 모처럼 동창 모임에 참석하는 모양인데 여느 모임과 달리 수선을 떨었다. 사느라 바빠 만나지 못했던 중년 여인들이 작심하고 모이기로 했다는데 초라해 보이기 싫었던지 이런 저런 준비가 많았다. 안하던 화장도 하고 입고갈 옷이 마땅찮다고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런 아내를 나는 죄도 없이 구석에서 초조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아내가 집을 나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은 그날 저녁 늦게였다.

 

모임에서 돌아와 즐거워야 할 아내의 얼굴이 이상하게 침통했다. 친구들 중에 슬픈 소식이라도 들었거니 했는데 아니다. 어이없게도 혼자만 바보같이 살았다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남편 모르는 비상금이 얼마라는 자랑이 꽃 피었다는데 유독 자신만 빈털터리라는 것이다. 황당한 나는 부부간에 그런 비밀이 무슨 자랑이냐고 달랬지만 막무가내였다. 지금 당장 대출이라도 받아서 5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남몰래 조성해야 할 비상금을 그렇게라도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렇더라도 뭘 어쩌겠는가. 이 땅에 이유 없이 잡혀 사는 남자가 어디 나 뿐인가.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종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집안 내력이다. 별 수 없이 거래하는 은행에서 500만원 마이너스 대출을 신청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아니, 좀 더 멀리 보면 인류평화를 위해서다. 그렇게라도 나의 부족한 경제력을 영양제마냥 보충하는 것이 두루 세상을 평안하게 지키지 않겠는가.

 

그날부터 나의 통장 잔고는 바닥을 기었다. 통장을 정리할 적마다 매번 대출 잔고를 의미하는 - 표시가 또박또박 잔액 앞에 찍힌 것이다. 한 달이 지날 적마다 이자가 더 빠져나가 - 금액은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더 커졌다. 반면 소소한 금액만 평온하게 들어왔다 나갔다 하던 아내의 통장에는 500만원이란 제법 큰 숫자가 시선을 자극했다. 그 많은 입출금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믿음직스럽게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뭐 보기만 그럴듯한 숫자다. 빠져나간 나의 통장 이자만큼 그 통장에는 예금이자가 불어나지 않아 그렇다. 뭐 겉만 번지르르 한 것 아닌가. 내가 아는 비상금이니 나 모르게 쓰일 리도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 금액으론 친구들에게 자랑거리도 못되는 금액이라 자존감이 높아질 리도 없다. 그저 괜한 모임참석의 부작용이다. 얻어지는 별 이득 없이 남편의 한숨과 아내의 안도감이 단순하게 서로 물물 교환된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아내를 위해 대출했던 바로 그 은행에서 나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 대출절차를 밟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서울 구로동에 있는 어떤 교회 신자였는데 지인 간 인보증이 인정되던 시절이라 서로 맞보증을 서고 500만원씩 마이너스 대출을 신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대출받은 금액으로 각 500만원씩 교회에 헌금을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이 십일조처럼 수입의 일부를 내는 것이 관행이요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대출을 받아서 헌금을 내라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을 텐데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어디서 그런 믿기지 않는 충성심이 생긴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돌이켜보기로 했다. 아니 이해하기로 했다. 나의 대출과 그들의 대출 중 어느 대출이 더 절실한 것인지 곱씹어보았다. 대출금액만 같은 전혀 다른 용도의 두 대출을 차분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전혀 다를 것 같았던 두 대출에는 놀랍도록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500만원이라는 대출금액이다. 그들이나 나나 적당히 부담 갈 정도의 금액이라는 사실이 같았다. 헌금을 위한 대출이란 점도 같았다. 아내에게 바치는 헌금이나 신에게 바치는 헌금이나 무조건적인 것이니 다 같은 헌금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대출이란 점도 똑같았다. 나도 그들도 마음이 불편하면 그 뿐인데 안식을 찾기 위해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자기희생적인 대출이라는 점에서 놀랍도록 일치했다. 또 있었다. 부자를 위한 빈자의 경제활동이란 점이다. 가난한 서민이 불필요한 이자를 감당해 거대 은행을 살찌워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게 그거였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다른 불편부당한 두 대출이 사실은 정당하다는데도 공통점이 존재했다. 누가 봐도 어이없는 대출 같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둘 다 꼭 필요한 대출이었다. 간절한 대출이고 긴요한 대출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간절하고 마음의 안식을 위해 긴요한 대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미 없이 지출하는 이자 역시 정당한 대가였다. 절대적인 존재에게 얻을 은총을 생각하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에 불과했다. 몸이 고생이지만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일이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일종의 행복추구권이었다.

 

선택이란 늘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전부 그른 것도 아니다. 뭐든 보이는 것이 전부도 아니다. 옆에서 보기에 한심해 보이는 그 무엇도 스스로 행복하다면 저지르고 볼 일이다.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강요하지 못하는 민주주의라는 제도 안에 살기 때문이다. 남녀가 평등하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으려면 그들이나 나나 탁월한 선택과 번뜩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치 그날의 대출(貸出)처럼 평생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일생일대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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