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노트
정민디
닥터 키보키언(Jack Kevorkian)은 누구나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고 안락사의 합법화를 주장했다. 130여 명의 죽음을 도와 준 안락사의 대마왕 일명 ‘죽음의 의사(Dr.Death)’다. 그를 진작 알았었더라면 그 새벽 이럴까 저럴까 말릴까 말까 하고 고민을 덜 했을까.
자정 무렵까지도 할머니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오래된 사진 뭉텅이를 꺼내놓고 평안한 자세로 한장 한장 넘기고 있었다.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더듬으며 본인의 자서전을 위해 해마를 거쳐 대뇌로 가 저장을 클릭하고 있었겠지. 비닐이 군데군데 벗겨진 까만 트렁크가 옷장 위에서 윗목에 내려와 있었다. 가방 안에는 관에 누울 때 입는 누런모시로 된 수의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곧 뭔 짓거리를 할 것인지 예감의 불이 확 켜졌다. 나는 짐짓 모른 체 하며 “할머니, 내일 상주해수욕장으로 바캉스 가.” 할머니가 보던 사진을 내려놓으며 지갑을 가져와 돈을 셌다. “또, 돈 다 썼지? 주머니에 그렇게 안 남아나니.” 끌끌거리며 늘하는 상거래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를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천진난만한 눈은 급하게 다시 사진으로 갔다.
할머니는 버킷 리스트가 있었다. 제일 가깝던 나에게 늘 얘기 하던 것들이었다. 제일 중요한 일은 빨리 죽기, 위 어딘가에 분명히 혹이 있다는 것을 수술해서 증명하기, 위가 나으면 매운 음식 특히 냉면 실컷 먹기, 얼굴에 검버섯이 피면 오래 산다니 수술 도중 마취한 김에 다 떼어버리기, 화투할 때 실컷 돈 좀 따보기, 근력이 빠져 덜렁덜렁해진 종아리 살 잘라내는 수술하기, 통일이 되어서 북에 있는 막내아들 재봉이가 돌아오면 롤렉스시계를 며느리에게는 다이아몬드 반지 주기, 기독교를 억지로 믿어 제사 안 지내게 해주기 등이 있었다.
할머니는 1905년에 황해도 재령 땅에서 여관을 운영했던 집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입고 말을 타고 나가면 가끔 돌아오곤 했던 한량이었고, 생활은 어머니가 책임졌다. 떠돌이들로 늘 북적대는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일찍이 딸을 평양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평양의 명문 서문여고를 졸업하고, 곧이어 사범학교까지 나와 교사 되었다.
1919년 유관순언니가 남쪽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무지막지하게 외칠 때 할머니도 북쪽에서 조그맣게 외치다가 일경에 잡혀갔다. 14살 짜리 어린학생이라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고 삼일절이 되면 늘 회상했다. 멋있있던 한량아버지가 그녀의 이상형이었지만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의사와 혼인했다. 할머니의 외삼촌과 의사 청년이 그녀가 수업하던 교실 창문 너머로 한 번 보고 가서는 바로 혼인 닭을 가운데 두고 맞절을 해버렸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다.
그리고 15년 후 그녀의 남편은 간호원을 뒷자리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고 왕진가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서른셋의 과부와 일곱 명의 자식만 남았다.
자고 있던 언니를 세시 반에 깨웠다. “언니, 할머니 네시에 집에서 나갈 거야, 아마.” 잠이 덜 깬 언니는 가만히 있다가 튀어 일어나 뒷집에 살던 할머니에게 뛰어갔다. 적어도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권리와 자유를 뺏을 수 없다는 거창한 명제 아래 나는 그냥 방에 있었다. 언니가 말릴 것이고 나는 예정대로 짐 싸가지고 피서를 가면 되었다.
시끌벅적 온 집안이 소란스러워 졌다. 벌써 약을 털어 넣은 뒤였다 서울대학병원 구급차가 왔고 누가 예전 의사 부인 아니랄 까봐 “60알 먹었어.” 했다. 이왕 이렇게 들킨 바에는 치료에 도움이라도 주자였다. 약이 오른 나는 병원에 따라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위세척을 하고나서 몸은 나빠지고 우울증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당신의 딸들과 손녀 손자들은 교대로 더 자주 화투를 치러 가야 했다. 늘 경외해 마지않던 할머니의 친구 화춘네 처럼 집을 나가 깨끗이 돌아오지 않는 죽음을 택할 줄만 철썩 같이 믿은(?) 나나, 잠깐 헷갈렸던 할머니나 한 세트로 시행착오를 한 것이 기가 찼다. 설마 집에서 ‘도전'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쥘 줄이야.
‘엔딩노트'라는 일본 영화를 봤다. 갑작스런 죽음 앞에 절망하기보다 성실하고 꼼꼼하게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아빠와 그를 응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엔딩노트>는 죽음은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모두에게 슬픔이 아닌 행복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관객들 스스로가 살아있는 지금을 어떻게 하면 더욱 행복하게 꾸려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한다.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아빠는 병원에서 위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아빠는 낙담하기보다 자신의 소신대로 죽음을 준비하며 꼭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을 꼼꼼히 써내려 간다.
할머니는 유달리 원칙주의자고 엄격했고 정직하고 정숙한 여인이었다. 남들에게 늙은이 냄새나게 할 수 없다며 샤넬 향수를 꼭 뿌리고 외출하던 할머니다(진실은 줄창 피워 대던 담배냄새 때문이다). 할머니도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처지였다면 훨씬 더 찬찬히 담담하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특별한 병명이 없는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조바심이 나서 60개의 알약이 필요했다. 위 수술을 해서 커다란 양성혹을 떼어내 자신의 진단이 초음파검사 기계보다도 나았다는것을 증명했지만 건강상태는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 이제보니 할머니의 병은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은 죽고 싶은 병이다. 청상과부로 일생 온갖 풍상을 거쳤고, 병명이 없이 온몸이 아픈게 원인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는 사는 데 급급했으나 막상 큰아들이 생활을 안정시키자 그때부터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생을 마감하고 싶었던 자유에의 도전은 2년 후에야 도우미 아줌마의 도움으로 결실을 봤다. 가정부가 뜨거운 죽을 마구마구 먹였던지 숨이 끊어진 후에 보니 토한 죽이 이불에 묻어있더라고 고모가 말했다. 질식사라고 추정되었지만 ‘죽음의 의사'가 되어 할머니를 존엄사로 이끌어 해방과 평안을 준 아줌마를 탓한 가족들은 하나도 없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할머니의 묘비에 표절해 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지금 요양원에 누워있는 나의 엄마에게 할머니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시간 이동이 오고야 말았다. 중증치매이고 근력도 다 없어져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다. 인지와 행동의 자유가 침대에 결박당해 있는 엄마를 보며, 남아 있던 삶의 두려움을 견디지 못했던 과거 할머니의 상황을 이제야 본다. 저런 시간이 닥칠지 모르는 나 자신에게도 깊은 연민이 몰려온다. 아니 생이 유한한 모든 생명에게도. 나도 슬슬 ‘엔딩노트’를 쓰기 시작해야겠다. 과연 우리 할머니와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었을 때 몇 가지나마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 그녀의 자유 의지는 존엄했다.
<2013 한국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