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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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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다    
글쓴이 : 이영희    17-07-09 06:03    조회 : 7,075

                               

                                                   쉽지 않다

                                                                                                     

                                                                                 이 영희

 

 

     ‘자학이 깊으면 성취가 높을 수 있다. 능력과 성실이 결합하면 그렇다. 하지만 자학으로 자아가 뭉그러지면 성취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실제 능력보다 자기 자랑이 큰 사람은 행복해 보이지만 막상 주위에선 그만큼 대접해 주지 않는다.’

   오래 전, 지하철 선반 위에 있던 너덜해진 신문을 내려 들춰보니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오기에 찢어 가방에 넣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한 번 더 보고는 책갈피 속에 끼어 넣었는데 그 쪼가리가 무슨 제목의 책에 들어있는지 잊고 있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들춰보다가 신문쪼가리를 다시 보았다.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무진기행속 밑 줄 친 문장들을 보다가 여기에 머문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잘 아는 체 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이것을 가면에 대입시켜 보았다. 가면을 벗는 것, 내면의 표정을 잘 가려주던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 그 가면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한 일이다. 불행까지는 아니라도 당황스럽고 겁나는 일이다.

    수필 강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속마음은 이랬다. 유명 작가들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었으며, 일기도 써 왔으니 이 기회에 한 번 써봐야지. 그리고 합평되는 글이 강남, 분당, 일산 어디든 비슷비슷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대부분이 가임기가 지난 중년부인들이 쓴 이야기다. 보석과 명품으로 치장한 우아한 부인들이 자랑 아닌 척 자식자랑, 학력자랑, 남편자랑 그리고 안방에서 화장실 가는 일만큼이나 쉬워진 해외에 다녀온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읽은 책을 나열하며 짐짓 자신의 품격 있는 세련된 일상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자랑 아닌 척, 내 이야기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달 후, 나름 소신을 갖고 쓴 글을 합평 받는 날이었다. 내 나름이라는 허상은 합평해주는 분의 짧은 몇 마디에 낱낱이 벗겨지고 말았다.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며 자유자재로 그야말로 세련되게 넘나들며 가르치는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장에 대한 기초가 얕습니다. 앞으로 마음에 드는 국내 작가의 단편을 베껴 보는 것이 글의 형식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글은 집에 가서 일기장에나 쓰세요.”

    온 몸이 쪼그라들며 머릿속에도 심장이 하나 더 있는 듯 꽉꽉 조여졌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 주제도 뚜렷치 않으며 일기 수준이라는 그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짧은 시는 공책에 옮겨본 적 있지만 긴 글은 필사해 본 적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쓰겠다고 수행하는 것처럼 그 일을 해야하나 싶었다,

    생각을 고쳤다. 누가 내게 진심을 담은 채찍을 내리 치겠는가. 우선 내 무지가 어디까지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단편과 함께 장편 소설을 필사해 보았다. 훌륭한 소설이라도 장편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선택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갔다. 눈으로만 읽었을 때와는 달랐다. 인간 본질을 신선한 통찰력으로 전달하는 재능과 문장의 힘에 더 기가 눌렸다. 책 한 두 권 베낀다고 당장 글이 좋아질 리 없다. 쓰기에 대한 두려움만 깊어졌다. 유치하고 부끄러운 내 생각과 행동에 대해 정직하고 대담하게 쓸 수 있을까?

    좋은 작품과 작가는 세상에 넘친다. 문창과를 나온 젊은 사람들, 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까지. 굳이 나까지 써야할까.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삶을 꿰뚫어 보는 독자들에게 작품을 읽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내 이야기가 사려 깊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저렇게 따지면 어떤 일이든 늦된 수재가 아닌 이상 이름을 세우기엔 한참 늦은 나이다. 그렇다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제는 쓰는 일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내 무지를 무지인체로 놔두었어야했다. 어쩌면 이 분야에 소질이 없으면서 유식하게 보이려 애쓰는 속물 같다. 그러나 이미 이만큼이나 써 내렸으니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조금만 더 이어보자.

    어느 날은 지면에 발표된 제목과 내용에 끌려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하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성급하게 써 본다. 잘 써질 것 같은 기분이 샘물처럼 솟는다. 청량한 맛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단정하던 걸음걸이가 문장이 길어질수록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제 멋대로 걸어가고 있다. 사람들에게 전달하고픈 진실은 간데없고 맹물 같은 사실만 밍밍한 감정으로 질펀하다. 걷힐 것 같지 않은 지독한 안개다. 이런 글은 두 다리가 멀쩡한데도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꼴과 같다. 무진기행속 주인공 남자가 하인숙에게 주려고 썼던 편지를 찢어 버리듯, 대책 없이 감정만 남아도는 이런 글은 미련 없이 삭제한다.

    그러나 제법 제목이 그럴듯하거나 주제에 미련이 남을 때는 모니터 저 안쪽 저장고에 가둔다. 시간이 흐른 뒤 그곳으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본다. 해가 조금씩 비추고 바람이 안개를 서서히 밀어낸다. 그때는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헝클어진 머리를 쫑쫑 가닥 가닥을 연결하여 다시 하나의 틀로 땋아본다.

     이렇게 글 한 편이 겨우 마무리 되면 해냈다는 만족보다는 가면을 벗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다시 밀려온다. 그래도 쓰자. 보이는 만큼만, 느끼는 만큼만. 어깨에 힘주지 말고.

     사실 너무 애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매끄럽게 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 .

 

                                                                                                                                 <2016, 9. 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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