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슬 아 치
노정애
우리 집에는 고슬아치가 산다. 고3이 벼슬아치라는 뜻으로 작은 아이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고3에 올라오면서 얻은 권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막강해진다. 식단도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으로 차리고 가족간의 모임도 아이 일정에 맞춰야한다. 자식이 상전이라고 했던 친정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여행도 자제하고 휴가는 꿈도 못 꾼다. 아이가 책을 사거나 버스를 탈 때 쓰는 아카(아빠카드)는 과하다 싶은 군것질과 꼭 필요치 않을 것 같은 문구류를 사도 눈감아주어야 한다. 웬만한 잔소리는 줄여야하고 TV시청도 자제하게 한다. 부부싸움도 할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수능이 지나면 그 막강한 권력이 끝난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번 고스라치를 둔 학부형들이 모인다. 까다로운 시어머니를 둔 동서들끼리 모인 수다 자리처럼 한배를 탄 동지의식을 느끼게 한다.
여름이후 참석인원이 현저히 줄었다. 모두 백일기도 떠난 것 아니냐고 참석한 엄마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 엄마는 절에 가서 열심히 절을 올리다 뒤를 보니 같은 반 학부형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새벽이면 정안수 떠 놓고 빌던 어머니의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나보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1등을 못하는 이유가 고3 아들을 둔 엄마들이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려서 라는 말을 들으며 웃기도 했다. 실제 새로운 컴퓨터 게임이 출시되거나 세계가 열광하는 큰 운동경기가 있을 때면 남학생들의 재수생 숫자가 늘어난다는 보고도 있으며 국가고시에서 여자 합격생이 평소보다 증가한다고 하니 이런 농담도 나오리라.
아이는 6시 40분에 집을 나서서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로 간다. 10시가 넘어 학교에서 나오지만 집근처 독서실에 갔다가 12시가 넘어서야 귀가한다. 주말이나 휴일도 대부분은 학교에 간다. 사실 학교가 아이를 키워주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공부만하는 아이들이 힘들겠다고 주위에서 말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성적이 오르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부모와의 갈등과 교우관계로 힘들어 한다. 많은 아이들은 공부만을 해야 하는 고3의 현실에 대해서는 체념한 듯 받아들인다. 미래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하다. 특색 없이 공부만 잘해야 하는 현실 탓을 하거나 눈만 뜨면 바뀌는 입시 정책에 울분을 토하면서도 수능이 다가올수록 학급의 분위기는 긴장되고 아이들도 예민해져 있다. 잠 많고 먹을 것 좋아하며 때론 엉뚱하기도 한 우리 집 고슬아치도 수능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이 커진다. 예민의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빵빵하게 부푸는 풍선 같다. 잘못 건드리면 빵! 터질 것 같아 조심스럽다.
그런 힘든 분위기 속에서도 가끔 일탈을 꿈꾸며 작은 즐거움을 찾아가는 아이들. 수능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오면 아이들은 수능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미리 생각하거나 기록하면서 잠시 머리를 식힌다. 평소 좋아했던 가수들의 콘서트를 가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친구들과의 여행도 계획한다. 읽고 싶은 책을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두기도 하고 미뤄뒀던 일들도 기록해둔다. 고슬아치의 다이어리에도 가고 싶은 곳이나 먹고 싶었던 것, 하고 싶은 일들과 평소에 보지 못했던 영화나 TV 프로도 보겠다고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깨알같이 쓰인 그 많은 것들을 참고 있는 것이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쯤 되면 여자아이들은 외모에 대한 걱정도 한 몫 한다. 온종일 앉아 있어 펑퍼짐 해지고 살 오른 몸들은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날씬하게 만들고 피부 관리를 받거나 성형으로 환골탈태할 가까운 미래를 기대한다.
“나는 살 빼고 쌍꺼풀만 하면 지금보다 훨씬 예뻐질 거야”
“근데 수능 성적이 잘 안 나와도 엄마가 수술을 해 주실까”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학교가 안 좋아질수록 미모가 받쳐 줘야한데. 그때는 더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고 했어.”
“와! 좋겠다. 우리엄마도 그랬으면”
이런 짧은 대화가 아이들을 공부로부터 잠시 쉬게 해준다.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작은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겠다며 예매를 부탁했다. 힘내서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조건을 스스로 내 걸었다. 고슬아치의 권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감히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말은 못한다. ‘수능이 끝나면 넌 그날로 찬밥이야’라는 말은 목 밑으로 꿀꺽 삼킨다. 대신 “고생했으니 쉬기도 해야지”라며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아첨꾼이 되어 청을 들어준다.
수능 날. 아이는 그간의 12년 공부를 평가받는 시험장으로 갔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집을 나서면서 책상위에 부모님께 드리는 글을 두었다고 했다. 새벽이면 일어나 밥을 차리고 늘 자신의 편에서 귀 기울여준 엄마에 대한 감사함과 휴일이면 학교, 학원으로 모시고 다니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아빠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편지다. 고슬아치의 권력이 시원섭섭하다는 내용도 있다. 수능이 끝나고 나올 때 웃으면서 아빠와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자신의 소망도 말미에 쓰여 있다. 고슬아치의 자리가 아무리 좋아도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아이. 본인이 가장 힘들었으리라. 부모에게 감사할 줄 아는 아이.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렸는지. 반듯하게 자란 것 같아 마음 한편 따뜻하다.
시험이 끝날 시간에 맞춰서 수험장으로 갈 것이다. 그간의 수고를 격려하고 무사히 수능을 치른 것에 감사하며 웃으면서 나온 아이를 힘껏 안아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