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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로용지의 함정    
글쓴이 : 노정애    17-09-05 20:14    조회 : 5,214

지로용지의 함정

노정애

 

10여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중년의 신사가 와서 신제품을 소개할 수 있게 해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들어주기만 해도 사은품을 준다고 했다. 그들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 모니터까지 보여주며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건강식품이라고 광고에 열을 올리는 영업사원. 설명을 끝내고 제시한 가격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건강과 가격을 사이에 두고 저울질하는 우리들에게 지로용지를 이용하라고 권했다. 카드 무이자와 같은 의미라며 10달에 나눠서 내면 부담 없는 가격에 건강도 챙길 수 있다는 그들. 아직도 할부지로용지가 통용되고 있다니? 기억이 자꾸 신혼시절로 옮겨갔다.

 

결혼을 하자 남편은 매달 들어가는 지출 목록을 보여주며 두툼한 지로용지를 넘겨주었다. 금액과 횟수가 적힌 용지는 24장중 19장이 남아있었다. 매달 불입할 돈은 5만원 정도였다. 은행원 남편의 월급이 85만원 정도였던 때다. 100만원이 넘는 물건이 무엇인지 묻자 시댁에 있는 냄비세트라고 했다. 어머님이 사셨는데 자신이 넣는다는 설명이었다. 가까이 시댁이 있어 자주 출입하니 늘 쓰는 그 냄비는 알고 있었다. 수입되어온 명품은 아니었다. 1/10 가격이면 살 수 있는 국산이었다. 빠듯한 신혼살림에 돈을 낼 때마다 짜증이 났다. 좋은 것이라고 냄비 자랑을 하는 시어머니를 보며 속으로 많이도 투덜거렸다.

3장의 용지를 더 잘라냈을 즈음 시어머니로 부터 점심초대에 함께 가자는 명을 받았다. 간 곳은 신라호텔 대연회장이었다. 10명씩 자리 잡고 앉은 원탁 테이블에는 어머니 또래거나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앉아 있었다. 300백여 명의 초대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 연회장은 장터처럼 시끌벅적 정신이 없었다. 잘 차려 입은 청년 혹은 중년의 남자들이 어른들에게 미소를 짓고 가벼운 포옹을 하면서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새댁인 내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되었다. 자기소개를 마친 사회자는 오늘 이 자리가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효도잔치라고 한다. 행사 진행자들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큰절을 올리고 어버이날 노래가 흘러나온다. 숙연한 분위기에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분들도 보인다. 가수도 초대했으니 흥겹게 놀고 즐겁게 식사하고 가시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음식은 느리게 나왔다. 메인 요리가 나올 즈음부터 사회자는 식사만하기 무료할 것이라며 자석이불세트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중앙무대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원앙금침처럼 떡하니 펼쳐진 이불세트. 자석의 효능을 설명하며 그 이불에서 자기만 해도 무병장수할 것처럼 말했다. 가격은 100만원이 넘었다. 어머님은 조금씩 불안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얼결에 따라온 나도 이 요상스러운 분위기에 어머님 눈치만 살폈다. 박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고 미국에서도 인정했다며 만병통치 이불광고는 계속되었다. 자식들 카드도 받아준다고 했다. 한 달 용돈으로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며 호객행위를 했다. 이 제품에서 자면 매달 병원비를 아끼니 그것으로 구입하라고 24장짜리 지로용지를 보여주었다. 내가 매달 짜증을 담아 지불했던 용지와 똑 같았다. 정신이 번쩍 났다. 그들이 바로 냄비세트를 판 사람들이었다. 과거 물건을 구입한 고객에게 다른 사람과 같이 와야 입장 시켜주는 마케팅에 우리 고부가 걸려든 것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합니다를 남발하고 어른들을 안아주고, 손을 잡고 노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면서 놀아주었다. 오늘 하루는 즐겁게 보내라는 멘트를 가끔씩 날리며 테이블 사이를 종횡무진 바쁘게 뛰어다녔다. 어른들은 그들의 친절에 쉽게 동화되어갔다. 외롭고 병든 노인들의 약점이 상술이 되었다. 나조차도 여유만 된다면 덜컥 사드리고 싶게 했다. 그러나 고가의 제품을 살 형편이 아니었다. 올곧은 성향의 어머님은 물건도 안사면서 밥 먹는게 죄 짓는 것 같다고 아기 손바닥만 한 함박스테이크에 손도 못되셨다. 물건을 사지 않는 그 자리가 가시방석 이였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물건을 구입했다는 팡파르가 울렸다. “봉천동에서 오신 000어머니 두 세트 구매하셨습니다. 이제 병원가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사회자. 덤으로 휴지나 설탕 같은 작은 사은품도 주었다. 며느리 눈치를 살피고 박수를 치는 어머님을 뵙는 것이 마치 내가 큰 잘못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알았다. 그날의 냄비세트도 그렇게 사셨다는 것을. 그들의 달콤한 친절에 넘어가서 지로용지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으리라.

결국 시어머니는 중간에 일어났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들은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아프다고 둘러대고서야 겨우 탈출했다. 밖으로 나와 내 앞을 질러 바삐 걸음을 옮기시는 어머니. 큰 시누는 멀리 영국에 살고 아들만 넷이니 누가 그들처럼 사랑한다고 안아주고 눈을 맞추며 살갑게 굴었겠는가. 어려웠던 살림, 불성실하고 무뚝뚝한 남편, 바쁜 아들들, 멀리 있는 딸, 힘들고 외로웠을 그분의 지난날이 뒷모습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머님의 등은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말보다 더 많은 말들을 하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가여운 분. 그 지로용지는 어머니를 외롭게 만든 가족들의 책임이었다.

나는 지로용지를 납부하며 더 이상 투덜거리지 못했다. 때때로 시댁에 가면 새로운 의료기가 보이고 설탕이나 휴지가 장롱위에 넘치도록 쌓여 있곤 했다. 가끔은 아버님의 월급과 살림 규모에 넘쳐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면 도와드리자고 남편을 이해시켜야했다. 심심찮게 그런 상술로 싸구려 건강보조식품이나 물건들을 팔면서 어른들의 쌈지돈을 터는 사람들을 붙잡았다는 뉴스를 접하면 그날의 어머님 등이 생각났었다.

지로용지! 지금은 5만원만 넘으며 카드 무이자로 나눠 낼 수 있다고 호객행위를 하는 마케팅 전략이 아니던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 할부제도 만큼 유용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무이자 할부라는 말에 지금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구매 했던가. 당장 내주머니에서 목돈이 나가지 않는 것에 안도하고 쉽게 물건을 사는 소비자의 심리.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기업들의 전략. 지금 필요하지 않은 것도 필요하게끔 포장하는 판매자들의 유혹과 많이 가져야만 많이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하는 그들에게 번번이 넘어가고 만다. 비움을 주장하는 선인들이 무소유를 외치지만 그 또한 실천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우리들의 소유욕을 충족시켜주면서 주머니를 털어가는 그들의 마케팅에 인간이라면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25년 전의 상술이 지금도 통하는 것을 보니 세월은 흘러도 우리의 본성을 변하지 않는가 보다.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 지로용지를 보니 어머님이 계셨다면 덜컥 사지 않았을까 싶다. 건강에 좋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로 용지를 이용하면 내가 먼저 사 드릴 수도 있는데 몇 해 전 시부모님들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때도 지금도 난 물건을 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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