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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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골목 끝에 이르자 길이 열리며 거짓말처럼 잿빛 건물이 나타났다. 전화로 확인한 곳이었다. 아래층은 점(占)집과 순댓국집, 옛날식 다방, 민속주점이 들어섰고, 그 위로 기획사, 직업소개소, 심리상담 센터, 떼인 돈 회수, 개인 회생?파산?면책, 그리고 내가 찾는 간판이 보인다. 전철역 화장실에서 뜯어온 쪽지를 꺼내들었다. ‘무통시술. 비밀 보장. 즉시 지급. 010-XXXX XXXX.’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사내가 말했다. “쪼가리 팔려는 감? 일단 나와 보셔. 상담료는 없소.”
복도엔 인적이 없고 찬 기운이 와 닿았다. 암모니아와 포르말린을 뒤섞은 냄새가 난다. 급수전 파이프가 낮은 천장을 따라 뻗었고, 깨진 보안등 위에 날벌레의 주검이 얼룩처럼 달라붙었으며, 찢긴 거미줄의 거미는 손님을 기다리는 작부처럼 엎드려 있다. 좌우로 늘어선 방들의 모양과 크기가 비슷해 어디에서든 거기가 거긴 것 같다. 소독약 냄새가 진해진다. 목적지가 가까워 오는 모양이다. 걸음을 옮기는데 몸이 비틀, 기울어진다. 증세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주머니 속 송곳을 더듬어 찾는다. 나를 찌르려고.
퇴직 후 한동안 출근 시간대에 맞춰 집을 나서곤 했다. 지하철 환승역에 내려 화살표를 따라 움직인다. 여러 사람들 틈에 섞이면 항상 안심이 된다.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 몸을 실었다가 산속의 계류 같은 하행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매달린 땅굴과 땅굴 사이에 걸린 잔도(棧道)를 걷기도 했다. 그러는 새 전쟁터에서 군주를 옹위하던 충직한 신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외톨이가 되곤 했다.
어느 날 난간에서 떨어졌다. 마침 전동차가 역 구내로 들어오던 참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건너편 차선이었다. 난 용감한 시민에 의해 구조되어 경찰서로 넘겨졌다. 형사가 이죽거렸다.
"부인과 애들을 생각하셔야지. 그래, 가족은 있소?”
"아, 예."
"운이 좋은 줄 아시오.”
"무슨?”
"구조된 것 말이오.”
“제가 구조되었나요?”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형씨가 발을 헛딛지 않았소?”
“제가 발을 헛디뎠나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오. 앞으로 주의하시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렇게 여겨졌다.
“아, 예. 잘 알겠습니다. "
형사가 면박을 주었다.
“알긴 뭘 안단 말이오? 나가는 대로 바로 병원에 가보시오!”
지하철 탐험에 싫증을 느낄 무렵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도를 펴놓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었다. 아마존 강을 폭이 좁은 배를 타고 지나며 분홍돌고래를 본 것은 적잖은 행운이었다. 케냐에선 흔들의자에 앉아 킬리만자로 산정에 얼어 죽어 있을 표범의 시체를 떠올렸다.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에도 가 보았고 산티아고 데 콤푸스텔라 순례의 길을 걷기도 했다. 티베트의 자치구역 샹그릴라에도 가보았다. 로렐라이 언덕과 하이델베르크는 수시로 드나들었다. 얼마 후 그런 상상도 시들해졌다. 가고 싶은 곳은 딴 곳이었다. 실제 가야할 곳은 또 다른 곳이었지만.
내가 정작 가려는 곳은 북극이었다. 푸른 보안경을 끼고 고드름을 수염에 매단 채 개썰매를 타고 눈보라를 헤치며 달리고 싶었다. 북극엔 깨끗하고 차가운 것, 순수한 것, 섞임이 없는 것, 비장한 그 무엇이 있을 터였다. 소금에 절인 청어의 뼈, 바람이 불면 귀신 울음을 우는 자작나무 숲, 얼어붙은 호수와 에메랄드 바닷물. 환한 여름밤과 캄캄한 겨울의 한 낮. 북극곰과 유빙(流氷), 만년설(萬年雪)로 뒤덮인 산정. 시린 하늘에 눈부시게 쏟아지는 극광(極光).
첫 증세가 나타난 것은 프랑크푸르트 행 루프트한자 비행기 안에서였다. 도시 상공에 이르자 비행기가 착륙모드로 접어들었다. 건물과 도로가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아흐퉁, 마이네 다멘 운트 헤렌!(승객여러분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때 증세가 나타났다. 공포감, 호흡곤란, 암흑시야. 승무원들이 달려온다. 별들이 빛을 잃고 의식의 천막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땅이 일렁인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 뚜뚜뚜뚜, 이머전시, 긴급 상황이다. 나는 북소리 같은 심장의 박동소릴 들으며 외친다.
“힐페!(Hilfe?도와줘요) 힐페! 쥐릭!(Zurueck?돌아갈래)”
세계를 그대 품 안에. 난 주재근무를 위해 신설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부임하던 참이었다. 그곳 한국인 의사가 진단했다. 지나친 완벽추구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로 인한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라고.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 세속(世俗)의 꿈을 꾼 다른 자들도 같은 병에 걸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주위 동료들에게 병을 감추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나마 유일한 방법은 증세가 나타나기 전 순간을 낚아 채 약을 먹는 것이었다. 의사의 지시를 어긴, 과다 약복용이었지만 당장을 견디어 내는 일이 급했다. 주머니 속에 작은 송곳을 갖고 다닌 것은 그때부터였다. 눈치 안채게 넓적다리를 찌르려고. 몸은 점점 나빠져 갔다. 나중에야 알았다. 과일 속처럼 단단한 몰락의 씨앗이 훨씬 오래 전부터 자라고 있었음을.
복도가 출렁거리며 다가온다. 폐수처럼 잠겨 있던 급수관이 억눌린 시궁창 물소리를 낸다. 보안등이 깜빡이다 터져나간다. 거미는 제가 짠 실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거린다. 눈먼 새 떼가 벽에 머리를 부딪고 떨어진다. 복도가 희뿌연 먼지 조각과 새의 울음으로 가득 찬다. 시야가 흐려진다. 아, 이런, 몇 걸음만 더…. 그 사내를 만나야만! ‘쪼가리 팔려는 감?’ 나는 무너져 내리며 주머니 속 송곳을 더듬어 찾는다.
* <<에세이스트>> 2015 연간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