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망년우(忘年友)
저녁나절 느닷없이 목에 통증이 찾아와 침을 삼키기조차 어렵더니 밤으로 들어서면서는 열까지 오른다. 아픈 게 정말 두려운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내일은 옛 친구들을 꼭 만나야 하는데......
신혼집 계약 기간이 다 돼서 새로 집을 구하러 다닐 땐 만삭이라 모든 게 힘들고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종아리가 붓도록 다리품을 팔면서도 흥이 난 걸 보면 온전한‘우리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픈 모성이 좀 더 컸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시댁에서 멀지 않고 전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새 집으로 들어간 즈음 그만 뱃속의 아기가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이삿짐을 다 풀지도 못한 채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임신 내내 입덧이 너무 심해 고생했지만 딸이 태어났을 땐 씻은 듯이 그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퇴원해 친정에서 삼칠일을 머물다 돌아오니 난 이미‘1층 새댁’으로 불리며 단지 내 한 가족이 돼 있었다. 역곡 근처 변두리긴 해도 막 분양된 새 아파트에서 첫애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하루란 설렘과 호기심 그 자체였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 달리 아파트 주민 간에는 제법 교류가 있었다. 더욱이 입주세대 간 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다른 유대를 가질 수 있었고 그 덕에 좋은 이웃들을 만나게 되었다. 십 년을 사는 동안 기회만 있으면 우리는 늘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에 대한 추억은 한결같이 음식으로 먼저 떠올려지게 한다. 아마도 함께 음식을 나누며 우애를 다졌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운 시집살이도 순하게 받아내던 5층 정례 엄마의 매콤한 미더덕 찜, 살림 야무지기가 친정엄마 손끝 같던 3층 민경 엄마의 건강식 피자,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2층 한별 엄마의 얼큰한 곱창전골, 고향이 시골인 세현 엄마의 구수한 된장 보리밥과 들깨 칼국수가 별미였는데 지금도 생각만 하면 침이 고이게 한다. 그밖에도 같은 동(棟)에 살진 않았지만 아이 키우느라 가까웠던 윗동의 멋쟁이 연창 엄마, 마음 좋은 윤지 엄마, 알뜰한 한수엄마까지 나이 차이가 위 아래로 조금씩 층이 지긴 해도 반은 내리고 반은 올려붙이는 말품이 불편하지 않았고 서로의 모난 곳도 품어줄 줄 아는 이웃사촌들이었다. 때로는 비슷비슷한 살림살이가 진부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작고 사소한 여유들이 지금껏 관계를 유지해 온 미덕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 건물 안에도 끼리끼리 어울리는 식구가 생기고 어느 순간 고만고만한 삶들이 시소를 타듯 몰려다녔다. 간혹 이웃 간에 실수도 하고 오해로 살짝 속상한 일도 왜 없었을까마는 그건 예전의 일이고 이제는 좋은 추억만 새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봄이면 쑥을 캐다가 쑥국을 끓이거나 쑥버무리를 해먹는 일로 다시 온 계절을 맞이했고 정기적으로 하는 연막소독 때는 이른 아침부터 복도 안으로 달겨들던 연기와 굉음에 밀려 꽁지 빠지게 달아나야 했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보온병에 커피는 물론 애들 간식까지 챙겨 놀이터 한 귀퉁이에 자리에 펼치니, 눈으로는 아이들을 좇고 커피를 마시며 동네 소문을 실어 나르던 그 몇 시간도 이제 와 생각하니 행복이었다. 여름이면 기저귀 봉투의 쿠폰을 오려서 교환한 대형튜브 두 개에 물을 채워 1층 복도에다 아이들의 미니 수영장을 열어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정신없이 노느라 허기가 질 즈음 컵라면에 김치부침개라도 부쳐다 주면‘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며 환호하던 녀석들의 표정을 어찌 잊을까. 늦가을엔 아이들을 모아 한 집에다 맡기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서울의 경동시장으로 내달렸다. 손목의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무거운 모과와 유자를 박스째 사와 나누고 다음날이면 벌써 설탕에 잠긴 과일 향이 문밖으로 번져 나오던, 아직도 그때 마신 과일 차의 향기가 코끝에 배어있는 듯하다. 겨울 김장철이면 집집마다 돌아가며 품앗이로 김장을 담갔는데 배추, 젓갈, 고춧가루, 마늘 등은 물론이고 사소한 재료에 이르기까지 알뜰한 공동구매가 기본이었다. 밤새 절인 배추의 물기가 빠질 즈음이면 어느새 현관문을 두드리며 빨간 고무장갑과 채칼을 들고 모여들던 부지런한 그녀들. 다라이 하나씩 차고 앉아 갖은 양념에다 농담을 버무려 배추에 비비다 보면 김장은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고 끝이 났다. 그릇들을 닦고 걸레질을 하는 동안 한쪽에선 돼지고기를 삶고 국을 끓였다. 그리고 김장 속을 담고 생태를 넣은 배춧국에 싱싱한 굴과 금세 무친 겉절이로 상을 차려 둘러앉으면 그날의 노고가 눈 녹듯 사라지며 겨울 양식을 준비했다는 안도감에 나른해지면서 까닭 없이 마음도 벅차올랐다.
어디 그뿐인가 시어머님이 황망히 돌아가셨던 1993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느닷없는 발병으로 짧지만 깊은 사랑을 주고 가신 어머님 영정 앞에 넋 놓고 있던 나를 가장 먼저 위로한 이들도 그들이었다. 아무 걱정 말라며 모진 바람을 헤치고 뜨거운 육개장에 정성껏 부친 전과 찬들을 장례식장으로 손수 만들어 나르던 사람들, 슬픔으로 무너지던 내 곁에 그처럼 따뜻한 이웃이 있어 맘 놓고 엎어져 울던 기억이 지금도 날 고개 숙이게 한다. 두고두고 갚아야 할 큰 은혜다.
엘리베이터가 없던 서민 아파트 5층까지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면서도 힘든 줄 모르던 우리, 언제라도 문 두드리면 찻물을 올리며 반기던 사람들, 충분히 가족처럼 되어버린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시절이 어느새 두텁게 쌓였다. 십년을 함께 살다 흩어진 뒤로는 오랫동안 전화로나 그리움을 달래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만남을 이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세월은 시위를 떠난 살(?)처럼 빠르기만 하다. 머리를 맞대고 육아의 지혜를 나눠 키운 아이들도 모두 잘 자라 그중 몇몇은 결혼도 하고 애까지 낳았으니 그저 놀랍고 신통할 뿐이다.
지금 내 곁엔 다시 새 이웃들이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문 열어놓고 지내는 관계란 쉽지 않고 며칠이 지나도 얼굴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렵다. 아파트의 풍경은 건조해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이웃들이 이국인처럼 낯설 때도 있다. 이러다 영원히 무관심한 존재들로 살까봐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론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피해 혼자 조용히 있고도 싶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앞으로도 오래 된 그때의 식구들과 더불어 가겠지만 살갑게 나누고 품어주던 옛정들을 고스란히 기대하진 않는다. 저마다의 사정들로 약속에 자주 펑크가 난다 해도 서운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평화롭게 낡아가며 조금씩 사위어지길 바랄 뿐이다. 다만 그 시간 위에 머물렀던 내 인생의 한때, 그들과 함께여서 의미 있고 행복했다고 더 늦기 전에 꼭 한 번 그녀들에게 고개 숙이고 싶을 뿐이다. 정례 엄마 김갑주씨, 민경 엄마 이미숙씨, 한별 엄마 이종옥씨, 세현 엄마 김연순씨, 연창 엄마 김영옥씨, 윤지 엄마 배영희씨, 한수 엄마 정미숙씨...
오랜 시간 동안 애들 뒤로 숨겼던 아낙들의 정겨운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약봉지를 뜯고 알약 몇 개 털어넣는다. 미열 때문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한데 불쑥 뜬금없이 찾아온 그녀들의 순한 얼굴들이 자꾸 눈에 밟혀온다. 오, 내일은 제발 씻은 듯이 나을지어다.
<2016 한국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