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쉼터
백 춘 기
아내 모르게 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나고 결혼식을 올린 명동성당 앞에 있는 로열호텔이다. 결혼하고 나서 일 년에 한두 번 가기도 하고, 몇 년 동안은 안가기도 했다. 부부관계가 좋을 때 가는 것이 아니라 말다툼을 했거나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 가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성격이 참 많이 다르다. 나는 남자이면서도 감성이 여린 A형이고, 아내는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B형이다. 서로 의견이 다를 경우 쉽게 양보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 옳다고 자기주장을 고집한다. 아내는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해 놓고 자기는 뒤끝이 없다고 말한다. B형 성격이 그렇단다. 그러나 소심 A형인 나는 마음의 상처가 오랫동안 남아 쉽게 녹아들지 않는다.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난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상의를 하여 위로를 받는다든지 다른 친구들처럼 술이라도 취하도록 마시고 풀지도 못하는 성격이다. 그럴 때 찾아가는 곳이 로열호텔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성격은 참 못났다. 옹졸하면서도 사내답지 못하다.
상대편의 의견이 내 생각과 많이 다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에는 당당하게 말하고 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주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냥 속으로 삭이고 살았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청소년기뿐만 아니라 결혼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연히 스트레스도 쌓이고 마음의 상처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어린 시절에도 심하게 꾸중을 들으면 나만의 은밀한 쉼터에 가서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하였다. 어떤 때는 이불장에서 잠들어 있다가 밤늦게까지 찾지 못한 부모님의 애를 태우기도 하였다. 뒷동산 양지바른 묘지의 잔디밭도 나만의 은밀한 쉼터였다.
나는 연애다운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스물아홉 되어 생전 처음 맞선이란 것을 보았다. 무더위가 한참이던 77년 7월 하순 그날 비가 많이 내렸다. 안양 현장에 근무하던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렸다. 약속장소인 로열호텔은 평소에 충분히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퇴근시간이라 많은 인파 때문에 빨리 갈 수도 없어 약속 시간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택시로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방향도 아니라서 할 수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약속시간에 20분이나 지나 겨우 도착하여 서둘러 호텔 정문에 들어서니 수위가 갑자기 막아서는 것이다.
“아니, 왜요?”
그러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저씨 신발 흙 좀 털고 들어가세요!”
참, 내! 수위가 보기에 호텔에도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행색이 초라하게 보였는가보다.
선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한껏 들떠 있었는데 기분이 뭉개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신고 있던 신발은 진흙투성이고, 입고 있던 근무복은 비에 흠뻑 젖어서 물이 줄줄 흘렀다. 후덥지근한 날씨로 땀에 젖어 퀴퀴한 냄새가 나기까지 하였다. 구두의 흙을 털고 들어가니 미리 와서 기다리던 아가씨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약속시간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을 보러 가는 사람이 최소한 옷이라도 깨끗하게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가야하는 자리였다. 그런 행색으로 나갔으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표정이 이상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대가 마음이 들지 않아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방송국에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잘 생기고 멋진 배우와 아나운서들만 보았으니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가씨는 자연인같이 아무렇게나 하고 나온 내게 이상한 매력을 느꼈는가보다. 선보는 그날 덜컥(!) 결혼을 약속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결혼식도 그곳에서 했다.
그곳에 가면 결혼 전 나로 돌아간다. 청순했던 아내 모습이 거기에 있다. 40여 년 전 그때의 나와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또 편안한 고향이 된다. 기분이 우울할 때 특히 아내와 냉전중일 때 아내 모르게 혼자서 다녀온다. 괴롭다고 뭉크의 그림 ‘절규’에 나오는 사내처럼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면 뭐하겠는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을 괴고 궁상맞게 괴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기도 그렇다. 찰리채플린이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랬듯이 괴로운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남들 눈에는 웃기는 일이다. 커피숍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처음 만났던 그때를 떠 올려 본다. 그렇게 꿈속을 그리다 보면 그동안 아내에게 서운했던 마음도 다 사라지고 다시 재충전의 시간이 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에 맞은편에 있는 명동성당의 성모상 앞에 서 있으면 청순하면서도 수줍어하던 그때의 아내 모습이 보인다.
금년이 결혼 40주년이다.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에는 아내와 함께 함께 가서 옛 추억을 되돌려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