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스버그에서 링컨(Abraham Lincoln, 1809 - 1865)을 만난다. 켄터키와 인디애나에서 자란 가난한 이 촌뜨기는 다양성을 가진 하나된 미국을 꿈꾸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까지 감싸안았던 유머와 재치를 지닌 이 사람. 일찍이 인생의 단맛보다는 쓴맛을 더 많이 보았던,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자국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 링컨을 그려본다.
미래를 향한 도약과 희망은 화합이다. 이것은 내 것만이 옳다는 아집과 고집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용할 때 이루어진다. 그 화합을 위해 겸손까지 겸비한 인물이 링컨이지 싶다.사노라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돌팔매질과 뒤통수를 치는 일이 허다하게 많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룬 적이 있는가?
그 분노를 푸는 간단한 방법은 용서이리라. 조건 없이 타인에게 선물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분노의 원인을 제공해준 그 사람을 용서하면 복수의 칼을 갈던 마음의 독이 빠진 내 영혼은 자유롭다. 작가 앤디 앤디루스는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주인공 폰더가 환상여행 중 만난 링컨을 용서와 관용의 인물로 묘사했다. “나는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맞이하겠다.
나를 음해하는 사람들, 태생이 야비한 사람들, 능력 없음을 남의 뒷다리 잡는 것으로 대신하려는 사람들, 난 그들을 용서하겠다. 나를 위해서다. 그리고 나 자신도 용서하겠다.” 라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결단은 언제나 관용과 용서라는 것이었다.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그 링컨을 생각해 본다. 게티스버그(Gettysburg)는 펜실베니아와 델라웨어의 접경지대다. 그곳이 빤히 내다보이는 패스트 푸드점에서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자는 존경을 받는다.
그런 뜻을 가진 인물들이 많은 국가를 나는 감히 선진국이라 부르겠다. 요즘 들어 부쩍 정계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곱지가 않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링컨 같은 지도자가 더욱 필요하단 인식이 든다.
민생고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탄식은 내 한숨과 직결된다. 빈익빈 부익부로 치닫는 사회현상이 심화된 지경이다. 놀고먹는 한탕주의 만연에다 계층 간 갈등의 골은 깊다. 곤두박질 바닥을 내리 친 정치는 갈곳없는 밑바닥 인생에게조차 위기불안을 조성시키니 자살자가 턱없이 늘어만 간다.
파워게임과 치부와 싸움질의 관습이 몸에 밴 정계는 천편일률에 지리멸렬하기까지 하다. 도약보다는 퇴보, 화합보다는 반목질시로 일관된 정치인들에게 그 무엇을 배우랴!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사는 나마저도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어 조바심이 난다.
세상사가 힘겨우면 사회정치와 무고한 남을 탓하며 투사하는 내 옹졸한 심사에서 비롯됐다. 위로하고 싶어지는 이즈음이다. 링컨의 꿈은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것만이 다양성을 내포한 이상 국가 실현이란 신념을 가졌다. 그 목적을 성사키 위해 남과 북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였던 격전지에 와있다. 이 전투에서 쌍방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묘지가 세워졌다. 1863년 11월 19일 헌납 식에서 링컨은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의 피가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 새로운 자유국가로의 탄생, 그리고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정부를 이룩할 것이며, 이러한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이라고. 세계역사에 길이 남으리만큼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남북전쟁이 언제 있었던가? 게티스버그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전쟁의 상흔을 보이는 무기들이 구릉진 잔디밭 이곳 저곳엔 널려 있다. 그 역사를 보관해둔 전시장의 물품들로 선혈이 낭자했을 전투를 가늠해 본다. 선열들이 피를 쏟고 죽어간 영광된 전장은 부럽기까지 하다. 원수가 된 남북이 총칼을 겨누기는 한반도라 다를까.
미국이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다면 내 조국은 이념이 달라 피를 뿌렸다. 전쟁은 비슷했으나 그 차이는 심히 벌어졌다. 이 전쟁 후 단결한 미국은 고도성장으로 급부상하였고. 두 동강으로 나눠진 한반도는 우리 민족의 가슴을 짓누르는 큰 바위덩어리가 되었다.
1809년 2월 12일 태어날 때는 '벚나무 껍질처럼 빨갛고 주름투성이의' 아이였던 링컨. 넓은 들판과 호수가 어우러진 캔터키(Kentucky) 하딘(Hardin County)의 이웃 사람들은 '뭐, 이 아이는 큰 인물이 될성싶지가 않아' 했다. 열악한 가정환경으로 온갖 잡역에서 놓이지 못한 그는 선원, 벌목꾼, 가게 점원, 측량기사, 법조인으로 숱한 직업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았으나 독서와 자기 개발에는 열심을 다했다.
'작은 엔진과 같은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가진 그는 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자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75센트의 선거비용으로 하원의원이 될 수 있었고. 그 후 가난하고 내세울 학벌도 변변치 않던 그는 1861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되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 연방정부는 흑인노예제도 폐지를 선포했다. 그것에 반발한 남부 11개 주는 미연방을 탈퇴했다(1860년). 급기야 남부연맹을 결성한 남부는 북부와 피를 흘리는 전쟁을 시작했다(1861. 4).
대통령에 재선된 그는 4년여에 걸쳐 힘들게 싸우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흑인노예해방이란 대역사적 과제를 풀고 종결지었다(1861-1865. 4. 9). 온갖 사연을 담은 국민들의 편지가 끊임없이 링컨에게 직접 전달됐다.
매주 하루는 이 편지들과 마주한 그는 관심과 사랑을 담아서 '따스하고 진심 어린 답장을' 써 보내주었다.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위해 정치가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 실례를 극명히 보여준 행동하는 지도자 링컨! 그 세계적인 큰 별이 1865년 4월14일 금요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배우 존 일키스 부스(John Wilkes Booth)의 암살로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게티스버그에서 관용과 용서의 사람 링컨을 추모한다. "가장 너그러운 화해의 정신을 발휘해 줄 것을 강조"하던 그의 넋을 기린다. 탁자에 놓인 찻잔에 켄터키의 촌뜨기이던 그 아이가 비치는 듯하다. 쓰지만 향기로운 커피다. 그 잔을 기울이며 답보를 거듭하다 공황 상태에 빠져 가는 고국의 앞날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