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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메이징 그레이스, 울산    
글쓴이 : 김단영    19-04-12 23:23    조회 : 4,561

어메이징 그레이스, 울산

 

김단영

 

   

비 오는 , 사위(四圍)가 고요했다. 빗소리도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어 보니 새벽 3시였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루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시곗바늘이 한참이나 기울어진 후였다. 벌떡 일어나 곤하게 자고 있던 아들을 다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아들도 나도 각자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잠결에 꺼 버렸는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5시에는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래야 520분에 출발하는 통근버스를 탈 수 있는데 늦어도 한참이나 늦어 버렸다. 아들도 허둥지둥 바지를 꿰입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들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했다. 제대하면 당연히 복학할 줄 알았는데 복무 중에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도 아니고 전공을 바꾸어 수능을 다시 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를 아예 그만두고 호주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군에 면회를 갔을 때 상병을 단 아들이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 번씩 해보는 소리려니 생각했지만, 제대가 가까워지니 먼저 다녀온 친구 이야기를 보태면서 구체적인 일정 계획을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학업을 마치고 취업도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주택이나 자동차소유하기 위한 돈벌이를 해야 한다고, 호주나 캐나다에선 경험을 사기 위해 돈을 벌고 또 쓴다고, 인생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논리를 .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지녀 해외 생활에 크게 거리낌이 없는 것도 요즘 젊은 세대의 특징인 것 같다. 아들은 삶의 방향을 자신이 정하겠다는 뜻을 쉽사리 굽히지 않았다.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어서 자퇴는 섣부른 판단이니 휴학을 연장하는 것으로 합의하여 일단락 지었다.

문제는 경비였다. 자식이 하고자 하는 대로 선뜻 지원해 줄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도 못한데, 그렇다고 빚을 내서까지 보내 주고 싶지는 않았다. 호주를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 보고 좋으면 거기서 영영 살겠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가고 싶으면 네가 벌어서 가라.” 며 남편도 반승낙하고 말았다. 아들이 예상하는 경비는 3천만 원이었다. 돈 버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울까? 힘들게 일을 하다 보면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셈을 해 보았다. 경비를 마련하는 동안만이라도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마음이 허우룩해졌다.

스물세 살인 아들은 몇 군데 알바를 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시급제 알바는 돈이 되지 않았다. 학생 신분이 아니니 전일제로 일을 해 보겠다고 했다. 두어 달 체력단련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가 싶더니 드디어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들어 보니 보수도 괜찮고 근무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석 달을 잘 다니는가 싶더니 또 다른 데로 옮기겠다고 했다. 웬만하면 한 군데 계속 다니기를 권했지만 아이는 이번에도 고집을 부렸다. 옮기고픈 곳에서는 ·야간 교대근무를 하는데 월급을 두 배로 준다고 했다. 월급을 많이 주면 그만큼 일도 힘들고 고될 텐데.

엄마의 걱정을 뒤로한 채 아들은 채용 면접을 보고 왔다. 그리고 자동차 공장의 촉탁 계약직사원이 되었다. 계약 기간은 길어야 1년 반 남짓인데 그것도 3개월마다 연장계약서를 작성한다고 했다.

 

재계약을 할 때는 근무 태도를 우선으로 본다며 절대 결근이나 지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들의 설명이었다. 아들은 목표가 있어서인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러 다녔다. 깨우지 않아도 한 보름 정도 잘 일어나더니 비가 오는 날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빨리 가자, 6시 반까지랬지?”

얼마나 늦었는지 시간을 가늠해 볼 겨를조차 없었다. 세수는커녕 눈곱도 못 떼고 겨우 옷만 꿰어 입은 채 차에 올라탔다. 새벽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제한속도를 훌쩍 넘겨 가며 질주했다.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달려서 드디어 공장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내려 주려 했더니 아들이 한사코 만류했다. 우회하는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출입문은 군부대의 검문소를 연상케 하는 규모로 경비원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아들은 우산을 쓰고 곧장 공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사라졌다.

아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거리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는 추적추적 계속해서 내리고 그 빗속 무수히 많은 오토바이가 한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토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스탕달 신드롬에라도 빠진 것처럼 주위천천히 슬로모션으로 움직였고 일순간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비가 내리는 꼭두새벽의 출근길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비를 입은 근로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길은 바로 아산로였다. 곧게 뻗은 아산로는 현대의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호를 따서 만든 도로다. 어린 시절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했던 그는 19986월 민간인 최초로 소 떼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한 마리의 소가 천 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간다.”라고 말하던 아산 회장의 일화는 들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찬비를 맞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묵묵히 이동하는 행렬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찬송가가 떠올랐다.

   

놀라운 은총이여! 너무나도 달콤한 그 음성이여!

나 같은 불쌍한 자를 구해 주시네요

한때 길을 잃고 방황했으나 지금은 나의 길을 찾았어요

은총은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이끄셨고

우리를 안식처로 인도해 주실 거예요

 

이 노래에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체로키 인디언의 사연이 어려 있다. 미합중국의 강제 이주령에 의해 많은 인디언들이 고향을 떠나 이동하면서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강제 이주를 겪으면서 원주민 4,000명 가량이 도중에 숨졌다고 한다. 그때 이들이 부른 노래가 바로 어메이징 그레이스였다.

죽은 이들을 땅에 묻으며 이 노래로 명복을 빌었고, 살아남은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이 노래를 부르며 힘을 북돋웠다고 한다. 오늘날 체로키 인디언들이 애국가처럼 부른다는 이 노래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들의 장례식에서 추모 노래로 불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괴롭고 힘들 때 이 노래가 불린 것은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어디로든 나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제나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다. 몸이 이동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앞서 길을 나설 때도 있다. 인생은 결국 어디론가 떠나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산로의 오토바이 행렬 덕분에 새벽부터 생각의 여정이 길었다. 울산은 남편이 나고 자란 곳이며 나도 꽤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지만, 이 도시의 이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장면이다.

아들을 출근시켜 주느라 다급했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돌아갈 길이 멀었다. 이곳과 우리 집은 서로 울산의 반대쪽 끝 지점에 있다. 나도 9시까지 출근해야 할 처지라 서둘러야 했다.

 

신호등에 걸려 멈춰 있으니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차여차해서 돌아가는 길이라 하니 허허 웃는다. 날이 새고 있었다. 태화강 변을 달리고 있을 때 아들에게서 고맙다는 문자가 왔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한 모양이었다.

집에서 떠날 날을 손꼽아 가며 아들은 적금을 붓고 있다. 열두 달이면 예상 금액을 모을 것 같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가 이제는 제 갈 길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노마드와 디아스포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나름대로 적응해 가는 아이를 섣불리 붙잡을 수도 등을 떠밀 수도 없는 것이 부모 된 입장이다. 그저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밖에는 해 줄 것이 없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이름으로 잠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들이 가고자 하는 길에 선한 빛이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수수밭길 동인지3호 《맑은 날, 슈룹》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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