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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C, 그리고 h에게 절하다    
글쓴이 : 오길순    19-06-22 22:48    조회 : 5,619

                                       H, C, 그리고 h에게 절하다

                                                                                            오길순

  오! 그리운 오두막이여/그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구나/ 일천삼백 리/오로지 주인 향해 기도했구나/ 제발 잘 돌아오라고/밤새워 외로웠을 나의 작은 오두막이여

현관을 들어서자 혼자 웅얼거려졌다. 잠긴 문 그대로 기다려준 집이 고마웠다. 한 이틀 이방지대에서 비운 짐 풀고, 방황했던 마음 한 바탕 정리하고 나니 꿀잠이 기다린다. 500여 킬로 여정, 느슨히 풀었던 신발 끈 다시 조이라는 H, h, 그리고 C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어진다.

탈출하자. H, h, C만 들고 떠난 추석날! 명절포상이 따로 없었다. 차례로, 밀려오는 제사로, 남의 집 귀한 딸 노예처럼 부리느냐고 하소연 한 적도 있었나니, 호령장이 그를 모시고는 연쇄반응인 양 H에게 명령했다. 어디든 좋아! 외로운 섬 출가! 야호!

설악산 가는 길은 그야말로 주차장이었다. 명절이 외로워서였을까? 세상사람 모두들 뛰쳐나온 것 같았다. 어쩌면 조상님 참배 길일지도...

단 한 번도 거역한 적 없는 H가 질주본능완료! 부르릉! 신호를 보냈다.

거역이라뇨, 주인님! 생각도 못해 봤어유!”

언제나 긍정의 달인, 스무 살 노령이건만 내 열손가락 밑에서 사방팔방 길을 잘도 틀 때면 이런 고분고분한 친구가 또 있을까 싶다. 어디서나 늘 진한 악수로 반겨주는 나의 고마운 핸들 H. 뜨거운 정이 벌써 손바닥을 통한다.

한가위 글 한 편 마무리하려 했었다. 궤도수정이 불가피했다. 제사를 끝내고 모두 떠난 자리, 섬 같은 외로움이 호령장이 그에게도 통했나 보았다. 떠나자. 갑자기 선택된 길, 다른 곳이 떠오르지 않아 정한 뭍길이었다.

다른 H들 뒤를 기다가 걷다가 꼬물꼬물 잘도 달려 따라가던 H. 내 열손가락을 공손히도 받쳐 든 채 회전과 환원을 거듭할 때마다 고속도로도 새처럼 날았다. 수 천 수만 촉수가 불을 켠 듯, 손가락 끝이 훨훨 날 때는 외로움 쯤 어느새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장하다, H!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붕새인가 비마인가?” 기다 뜨다 날다가도 주인장 놀랄까 미끄럼 타듯 사르르 멈추는 이 지성스런 충성!

! 기름이 부족한데?”

호령자가 옆에서 거들었다.

무슨 걱정이셔유? 지가 있어유.”

화수분 C가 기다렸다는 듯 툭 튀어나왔다. 콸콸 휘발유를 채운 신용카드 C, 이에 질세라 핸드폰 h도 선뜻 나선다. 한 평생 마이크만 잡았을 h의 세련미 넘치는 음성.

설악산 신흥사주차장까지 4시간 38분 걸립니다.”

오호라! 내 낡은 귀청을 깨우는 이 낭랑한 목소리, 시낭송 하듯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에 대동여지도 김정호를 모신 듯 귀가 번쩍 뜨인다. H, C, h, 이 셋이면 조조도 부러워 할 일. 길 척척, 기름 척척, 내비 척척! 신통방통척척박사들과 방방곡곡을 누빌 때면 거미줄 같은 골목도 걱정이 없다. 왕거미 같은 h의 지시를 따라 갈 때면, 내 헌 운동화는 어느새 비사처럼 날개를 달았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셨으면 우리 손녀딸은 요술공주여침이 마를 지경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명절이 공휴일쯤으로 바뀐 듯하다. 온종일 차례 상 앞에서 담소하던 대소가 사람들도 여행길로 나선지 오래 되었다. 고운 한복 차림, 골목골목 가득하던 아이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딱지 치고 풍선 터뜨리며 들썩이던 골목에 자동차 몇 대 한가로이 지날 때면 저 멀리 사라지는 명절이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종부가 멍에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두 발목이 앉은뱅이 되도록 몇 십 년 연습한 상차림은 불에 탄 새끼줄도 머리처럼 땋아 내릴 줄 아는 노년을 만들었다. 이제야 그 많던 제사는 어리석은 나를 깨우치려는 선영들의 몽둥이였구나, 싶어진다, 인간 생로병사 네 분 고이 모셨고 두 남매, 손자손녀까지 생산했으니 한 이틀 쯤 놀아도, 등 두드려 주실 조상님 아닐까?

신흥사 주차장은 새벽부터 만석이었다. 주차증을 끊어주는 청년주차요원의 풍족한 듯 바쁜 것도 보기 좋았다. 새벽을 달려와 두어 시간 기다렸을 관광객들, 권금성 케이블카 속에서 탄성의 연속이다. 밀림처럼 빼곡히 서서도 구름을 떠도는 듯한 50여명의 눈빛. 어느새 울산 바위 너머 내 마음도 하늘을 둥둥 떠가고 있었다.

럭키산맥 꼭대기에는 무릎 꿇은 나무가 있다더니 권금성 꼭대기에도 등 굽은 소나무가 많았다. 권씨와 김씨가 쌓은 성이라는 권금성에 뿌리내린 나무들의 생애, 터를 잘못 잡은 인간사와 다름없었다. 하필 그 추운 고지 삭막한 바위틈에 솔씨는 가녀린 씨앗을 묻었나? 비바람 눈보라 칠 때마다 엄마! 엄마! 애절히도 울부짖었을 소나무줄기들. 바람 속에 서러웠을 하소연이 들리는 듯하다. 끝내 해골처럼 드러누워 버린 하얀 소나무그루터기 옆에서 사진 한 장으로 나무의 영혼을 달래고는 무학송 길로 접어들었다.

팔만사천 무량한 부처말씀이라는 벼랑에서 800년 나이에도 청년처럼 성성한 舞鶴松. 정말 학이 춤추는 듯 아름답다. 고려를 거쳤을 소나무는 아직도 수줍은 미인처럼 붉어진 볼로 오륙 백리 길손을 솔향기로 반긴다. 안락암을 더듬어 작은 돌 하나 무학송 뿌리에 살짝 올려놓으니 안락한 평화가 가슴에 밀려오는 것 같다. 바로 이름 따라 가는 마음 길. 숨찬 내 호흡을 가다듬은 무학송은 하늘에 깃털을 치켜들고 솔바람 학춤으로 다정히도 배웅을 한다.

선인들도 외로워서였을까? 비선대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 그들도 H, C , h가 있었더라면 이름 석 자 새기는 대신 붕새처럼 훨훨 길을 나섰을지도 모른다. 기어이 풍화될 이름, 바위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글씨체가 무슨 소용이랴! 가자! 오색약수터로!

오색약수 싸한 물 한 모금 물고 한계령에 오르니 벌써 어스름이다. 굽이굽이 폭설이 한계령을 덮었던 삼십 여 년 전, 젊었던 저 호령자와 초등학생 아들이 한계령 눈 바탕에서 바퀴에 체인을 호호 감고는 살얼음판 고갯길을 설설 기어 오른 적 있었지. 폭설에 구르면 다시는 못 올라 올 것 같은 아스라하던 벼랑, 어느새 아버지 연륜이 된 아들은 그만한 아이를 두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인제를 향해 절을 올리듯 H에게 공손히 속삭였다.

가자! 그리운 오두막집, 내 작은 섬으로!”

 

    문화강남 2019. 3(강남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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