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들
오길순
‘인연’이란 말, 참 듣기 좋다. 어감만으로도 가슴이 충만해질 때가 있다. ‘천사’란 말, 더욱 그렇다. 죽었던 세포도 살그머니 새 살이 돋는 것만 같다. 어디서 비롯된 인연이었기에 그리 충만했었나? 그 분이 사는 한강변 아파트를 지날 때면 보고 싶은 마음 샘물처럼 솟는다. 어쩌다 공항 가는 길에 남편에게 말했었다.
“윤 선생님 보고 싶네. 못 본지가 몇 해야?”
남편은 볼이 발그레 해지며 대답했다.
“언제든지 만나! 인생 몇 천 년이라고 보고 싶은 분을 못 만나?”
태평양처럼 넉넉한 대답이다.
윤 선생님과의 인연은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서울에 갓 입성한 시골뜨기가 산동네학교에 발령을 받고는 6학년을 함께 하면서였다. 조용하고 따뜻한 성품인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면 왜 그리 편안한지, 틈만 나면 붙어 다녔다. 출근길도 퇴근도 함께 했다. 사는 동네도 같아서 온종일 같이 지내는 셈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도착하면 우선 전화를 들었다.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하루 종일 지내고도 또 그리워졌다.
동료들은 그런 우리를 부러워했다. 어떤 이는 동성연애 하느냐며 농담을 하는 이도 있었다. 도시락도 나누어 먹고 수업 정보도 공유했다. 이 다음 아들 딸 자라면 사돈하자며 언약한 적도 있다. 서울 살이 미숙한 내게 그는 선생이며 어머니며 친구 같았다. 때로는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처럼 촌뜨기를 알뜰살뜰히 보살폈다. 조용하고 여성스럽고도 인정 많은 그의 별명이 윤 천사였다.
어느 날, 윤천사 반 아이가 화장실 지붕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을 본드봉지에 묻은 채 환각으로 쓰러진 아이를 본 윤 천사는 기절하실 정도였다. 청심환을 사다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가슴을 부둥켜안았다. 또 한 번은 한 아이가 면도날로 앞에 앉은 아이 등을 그어 내린 적 있다. 피가 낭자한 걸 본 윤 천사는 초죽음이 되었다. 119가 다친 아이를 우선 싣고 갈 때 우리는 함께 울었다. 교육이야말로 생명을 좌우하는 직업이란 말이 사무쳤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의 생활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나야말로 그대 만난 것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오. 함께 근무할 때 아침마다 만나는 기쁨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니까...”
얼마 전 늦게야 보내드린 수필집을 받으신 소감을 전화로 메시지로 전해주셨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역시 내 애인, 존경 또 존경, 역시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오길순이오. 너무너무 고맙고 사랑합니다.”
윤천사의 과분한 말씀에 나도 고백했다.
“그 시절 선생님 겨드랑이에 팔을 끼면 왜 그렇게 따뜻하던지요. 촌것이 촌것인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어쩌면 고희가 넘도록 살아남게 한 분 중 가장 소중한 분을 꼽으라면 선생님이셨어요. 우리 이성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죠? 하하!”
학창시절 농구선수였다는 윤천사는 아이들을 늘 운동장에서 씩씩하게 교육했다. 팔순이 훌쩍 넘은 지금도 지역 탁구 선수로 활약하실 것이다. 그리 오래 교분을 나누면서도 열 살도 더 젊은 내게 말씀 한 마디 함부로 하지 않던 윤천사.
서른두 살, 내가 어려움에 빠졌었다. 노후대책으로 사 둔 어디 작은 집에 살던 여성이 당장 전세비를 내놓으라며 을러댔다. 한 이틀 교무실 전화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상사에게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빌려달라는 말, 정말 어려웠지만 난생 처음 차용을 해야 했다. 어떤 동료에게 조심스레 부탁하니 은근히 윽박지르듯 말했다.
“갚는다는 날, 꼭 갚아야 해요?”
“그럼요! 그럴께요!”
그래도 감사히 잘 쓰고는 약속한 날 갚으려니 그 동료가 말했다.
“윤 선생님이 그 이튿날 갚으셨어요.”
동료의 한 마디는 간결했다.
“오백만원을 갚아 주셨다고요?”
놀라서 물었다. 큰 소리로 말하는 동료 앞에서 고개 조아리듯 풀 죽은 내 모습을 윤천사가 보신 모양이었다.
“아니! 오길순을 저렇게 함부로 하다니!”
그러고는 주택청약예금 200만원과 착실하게 모은 정기적금 300만원을 해약했나 보았다.
남편은 “당신을 뭘 믿고 그 큰돈을 몰래 갚으셨는지 모르겠다” 며 부모 형제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동 학년 주임이었던 또 다른 동료 양 선생님도 거액의 통장과 도장을 성큼 넘겨주며, 맘대로 쓰라고 했을 때는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진 것 같았다.
“선생님, 빨리 주택청약 드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져요.”
해약한 청약예금 다시 들라며 윤 천사께 닦달하다시피 졸랐다.
“이 봐! 지난 번 이백만원 청약도 그대가 들라고 해서 들었으니, 해약했어도 암시랑토 안 해, 그러니 걱정 말어. 다시 큰 것으로 들께.”
해약이 아까워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윤 선생님이 오히려 위로해 주셨다,
“그거 당첨돼도 작아서 못 살어. 잘됐지 뭐야? 어차피 좀 큰 것 해야 해.”
그러고는 높인 청약예금으로 다시 가입한 것도 내 성화 때문이라며 티 없이 웃으셨다,
윤천사가 한강변 널찍한 새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교장선생님인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했다.
“이 집은 오선생님께서 사주신 집입니다.”
“예? 과분하신 말씀이셔요.”
몰래 빚을 갚아준 분들이 오히려 축복을 넘기시다니! 부창부수 천사들 같았다. 조촐한 내 생애, 그토록 고우신 분들과 오래 우정을 나눴던 기억만으로도 충만해지곤 한다. 그와 나는 어떤 인연이었기에 평생 그리워하며 사는 걸까?
앙투안 콩파뇽은 ‘우정이란 서로 섞이고 녹아들어 각자의 형체가 사라지고 더는 이음새도 알아볼 수 없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런 상태 아니었을까? 몇 억이 저금된 통장을 선뜻 넘겨주셨던 양선생님은 훗날 서울시 교육청에서 이 나라 교육을 위한 중추적 역할을 하셨다.
어쩌면 나의 오늘은 인연을 연인처럼 여긴 천사들이 주신 소중한 선물 같기만 하다.
<<한국산문>> 2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