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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    
글쓴이 : 오길순    19-06-25 06:59    조회 : 5,030

                                                                                                                                                                                           

                                      반지

                                                                               오길순

처녀는 야트막한 초가 담 이엉 저 너머로 왼손을 깊숙이 넘겼다.

,성님!”

그녀의 비명 같은 인사가 왼손약지의 비밀을 더욱 고백하는 것 같았다. 잃은 사람이 죄인이라는데, 몇 달 전 잃어버린 가짜 다이아 반지로 인해 나는 끝내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반지의 기원은 약 4800년쯤 전이다. 그 옛날에도 사랑의 약속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나 보았다. 결혼의 정표를 귀한 것으로 찾았을 선인들 마음이 애틋해진다. 신분에 따라 금, , 철 등 재료도 달랐다니 기쁨과 슬픔이 서린 청춘의 대명사가 반지였을 것이기도 하다. 구리반지 하나도 사 줄 수 없는 총각들은 <<반지의 제왕>>에서 물고기를 잡다 반지를 주운 디골처럼 사랑의 절대반지 하나 줍기를 간절히 꿈꿨을지도 모른다.

 희랍신화에서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바위를 깎아 반지를 낀다. 인간을 사랑한 그의 동그라미의 영원성은 불멸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제발 부탁입니다. 여기에 놓았던 제 약혼반지를 꼭 돌려주셔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지인의 출판회장 화장실 벽에서 A4 포스트잇이 눈길을 잡았다. 세면기 물에 젖어버린 전화번호가 약혼녀의 애절한 눈물처럼 보였다. 불멸의 사랑 다이아반지가 물때에 오염될까봐 잠시 빼놓은 게 그만 그리 되었지 싶었다.

결혼이 가까울 즈음, 시어머니는 내게 현금을 듬뿍 주셨다. 알아서 패물을 준비하라는 합리적인 구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처 반지 하나 값이 안 되었다. 오막살이일망정 큼직한 다이아 반지를 끼워 줄 신랑을 꿈꾸던 내 마음이 여지없이 뭉개져버렸다. 열 손가락 모두 빛나는 반지를 끼고도 싶었던 허영심에 쐐기가 박힌 심정이었다. 다행인 것은 원하던 패물을 모두 사고도 현금이 남았다. 금목걸이, 금팔찌, 백금 가락지, 백금반지 외에 유사보석인 모조다이아를 끼운 덕분이었다.

아이고 머리아파!’라는 농담이 유행일 때가 있었다. 비싼 반지를 낀 사람은 이마에 손을 얹고 아픈 척 자랑한다는 걸 빗댄 말이었다. 반지를 낄 때마다 자랑은커녕 손가락을 감추고 싶었다. 그래도 하객들은 주렁주렁 꿴 결혼식 패물에 부잣집 며느리인 줄 아나 보았다.

, 네 반지는 알이 크구나!”

그 즈음 결혼한 선배가 자기의 작은 다이아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다이아는 밤에 보아야 더 빛이 난대.”

선배의 그런 이야기에도 나는 고개만 숙여졌다. 선배의 보석 알은 맑고도 깨끗했다. 투명한 반사는 진짜만이 갖춘 눈부신 빛 같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못하는 내 속맘을 선배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명절이나 방학이면 나는 시댁으로 달려갔다. 시부모께서 간절히도 기다린 때문이다. 사글세 집 문고리가 허술하니 귀한 것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몇 백리 길을 나섰다. 갓난아기와 둘이서 완행열차를 타고 가노라면 혹시 나쁜 손이라도 들어올까 봐, 가방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친정어머니가 해주신 가래떡 한 말과 김이며 고기까지 챙기면 이고 지고 들고 가는 그 길이 천만리처럼 멀었다. 그래도 반겨주실 시부모님 생각에 이바지 보따리가 무거운 줄도 몰랐다.

시댁마을 버스정류장에 내릴 즈음이면 꼭 어둠이 기다렸다. 인적 없는 산골길 삼백 미터에서 맹수라도 나올까 등에 업힌 아기만을 꽁꽁 챙겼다. 짐승이 나오면 떡 보따리를 던져 주리라, 두려움으로 들어서는 내 맘을 아실 리 없는 시아버지는 이튿날이면 꼭 나를 데리고 들에 나가셨다.

이 논이 우리 것이다, 저 밭이 우리 것이다. 이 담에 다 네 것이다.”

모시바지에 이슬이 함빡 배이도록 논두렁 산책을 하고 나면 마을 정자로 향하셨다. 일찍이 마실 나온 동네 어른들에게 특유의 천진스런 미소로 며느리를 자랑스레 인사시키셨다. 평생 험한 말 한 마디 해 본 적 없을 시아버님의 천진스런 미소는 며느리들에게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곤 한다.

그날도 아기를 업은 채 논두렁 산책을 마치고 들어선 길이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방문에서 찬바람이 이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윗방에 두고나간 가방이 열려있었다. 패물 주머니도 풀려 있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다이아가 낀 백금반지만 사라졌다. 큰 잘못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차라리 황금붙이를 다 가져갔다면 다행이련만. 부잣집 맏며느리인줄 알았던 누군가가 실망할 걸 생각하니 더욱 얼굴이 붉어져 허둥댔다.

왜 그러냐?”

아무 것도 아녜요.”

내 대답에도 시어머니는 대충 짐작이 되신 모양이었다. 표정만 보고도 우린 이내 아는 친하고도 익숙한 사이였다.

어쩔 것이냐, 내가 해줄 형편은 안 되고...부지런히 벌어서 똑 같은 것 다시 해라.”

말씀은 그리하고도 동네로 수소문 하러 나가셨다. ‘네가 우리 큰 며느리 가방 속을 봤느냐’ ‘우리 며느리 물건을 혹시 가져갔느냐?’ 짐작이 가는 사람마다 사정사정 묻고 다녔을 것이었다. 나 역시 짐작이 가는 이가 있었지만 소문나면 동네방네 부끄러움만 더할 것 같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일찌감치 귀가 길에 올랐다. 마음이 불편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보리쌀 한 말을 들려주며 정류장까지 나와서 위로하시는 시어머니께 기어이 닷 되를 덜어내고는 휘적휘적 돌아오는 그 여름날은 유난히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 해 추석은 하늘이 거울처럼 맑았다. 마침 시댁 고샅을 산책하는데 짐작했던 처녀와 딱 마주쳤다. 그도 흠칫 ,성님비명처럼 나를 불렀다. 초가 담 야트막한 이엉 너머 깊숙이 넘긴 그녀의 왼손을 보는 순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염소인 양 대충 인사하고는 어서 돌아섰다. 분명 붉게 충혈 된 얼굴로 허둥대는 그녀, 그녀의 왼손을 보았다.

출판회장 화장실에서 애원하던 약혼녀는 반지를 찾았을까? 불멸의 사랑이 오래 이뤄지기를. 나 역시 선배에게 들려주고픈 부끄러운 고백이 있다.

언니, 그 때 내 다이아 가짜보석이었어요. 언니 것은 작아도 눈부셨는데 내 것은 커도 유리알처럼 흐렸어요.”

다행히도 몇 십 년 만에 선배를 만났으니 근사한 식사 한 끼 나누면서 말하리라.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을 백금반지 처녀에게도 전하고 싶어진다. 그대 덕분인지 내 인생 그런대로 무난했다고. 때로 험난했던 적도 있지만 진한 불행도 잘 넘겼다고. 혹시 그대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있다면 이젠 정말 마음 편하라고.

그리고 그의 왼손 약지에 작은 반지 하나 끼워주고 싶다. 이젠 진짜 다이아로.


<<한국산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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