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여섯 시
진연후
금요일 오후 여섯 시, 낯설다. 하늘도 바람도 나무도 색다른 공간에서 조금쯤 분장을 하고 만난 것처럼, 아니 늘 보
았던 분장을 지우고 나온 것처럼.
사람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고 느끼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용량 초과에 걸려 몸살이란 놈이 기웃거리기에 오늘 하
루 출근시간을 늦추었다. 이제 나가느냐는 경비 아저씨의 인사를 어색하게 받고 해거름에 출근하는 상황을 설명이
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엉거주춤하다가 피식 웃는다. 매일 밤마다 일 나간다고 말해도 아무도 그 일에 관심 없을
거라던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타고난 생김새나 여성스런 꾸밈과는 거리가 먼 나를 두고 놀리는 말이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는 이들인가. 아이 손을 잡은 주부들이 오고가는 길에서 이방인처럼 나는 길 가장자리만을
찾아 땅만 보고 걷는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좀 낫다. 방금 집에서 나왔는지, 들어가는 길인지 표 나지 않을
거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한 것이다.
의자에 앉아 평일 저녁 여섯 시는 이런 하늘이구나, 공기가 이렇게 다르구나, 새로운 것이라도 찾는 듯 두리번거리
는데 길 건너에 공익근무요원 둘이 지나가는 게 보인다. 퇴근하는 모양이다. 소리는 없고 화면만 있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그들은 평화로운 하나의 풍경이 된다.
재작년 오월에 개성을 다녀오며 보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관광버스 안에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창 밖으로 보이
는 건물들과 사람들이 낯설면서도 시· 공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느낌, 일반 주민들보다 군복 같은 걸 입은 이
십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눈에 오래 머물렀던 기억. 그들은 어떻게 살까, 무슨 생각을 할까, 호기심의 대상도 되
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조용한 풍경이었다. 그래, 그냥 일상일 것이다.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서로 소
통의 필요성이 없다면 타인의 일상은 좀 더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의 배경이 될 수도 있다.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옆으로 나란히 앉는다. 아이의 말투와 행동이
가끔씩 근처 복지관 앞에서 마주치는 아이들과 비슷하다. 엄마로 보이는 그녀는 아이에게 버스 번호를 알려주고
이제는 혼자 타고 다녀야 한다며 주의를 주고 아이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린다.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만났던 재활원 아이들이 떠오른다. 일 년에 한두 번 아이들을 데리고
시내 구경을 했었다. 아이들 손에 버스비를 쥐어주고 반 발짝 옆에 서서 세상을 향해 손을 드는 그들을 보며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라고 감히 고민했던 기억 속의 나는 그들보다 더 두려웠던 건 아니었나싶다. 버스를 타면
차비를 내라는 둥, 우리가 내려야 할 곳을 잊지 말라는 둥 입으로는 주의사항을 반복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걱정을 했었다. 시민들이 불편하게 쳐다보거나 안전사고라도 생길까봐 지나치게 긴장했던 기억이 나서 슬그머니
어색하지 않은 미소로 옆을 돌아보고자 하는데 그것도 마음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늘 마음만 앞서거나 신
체 반응은 한발 늦거나 하여 어색해지는 것이야말로 관계 맺기에서 풀어야 할 과제이니까.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가 아이의 탄성에 허리를 펴고 입에 힘을 주며 보니, 지붕 없는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이십
대 남녀를 태우고 질주한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의미 없이 내뱉고 짧은 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있다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길 건너 지나가는 이들처럼 잠시 나란히 앉
아 있던 아이 엄마처럼 나도 그들에게 딱 그만큼의 존재일 것이다.
익숙한 출근길이 지루해질 때 가끔 가보고 싶은 어느 거리에 있다는 상상을 한다. 낯선 거리에선 안달했던 일들에
거리를 두고 감정을 정리할 수도 있고, 타인의 시선에서 얼마쯤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부
딪칠 때 누구 한 사람 낯선 그림 속에 있거니 여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버스가 왔다. 여유로워 보이는 다른 이들의 금요일 오후 퇴근길 풍경을 보며 주말에 더 바쁜 학원 강사로서의 일상
으로 돌아온다. 오늘 하루도 부디 내 감정이 낯설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책과 인생. 20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