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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림보의 고백    
글쓴이 : 진연후    19-07-29 23:41    조회 : 3,879

느림보의 고백

진연후

느리게 걷는 것뿐이다. 그 곳에서 하고 싶었던 건. 몸과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선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산과 바다, 물빛이 모두 푸르다하여 청산여수(靑山麗水)라 불려왔다는 청산도. 소리꾼 아비와 남매가 북장단에 맞

추어 소리를 하던, <진도아리랑>이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펼쳐졌던 그 길이 떠오른다. 현실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 롱테이크 샷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전문적 용어와 상관없이

 시간이라는 단위를 늘여놓을 수도 멈추어 놓을 수도 있는 그 길을 걸어보고 싶기도 했다. 평소 생활도 느리기가

남부러울 것 없는데 굳이 그 곳을 찾아간 건 나만 느린 것이 아니라고 위로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슬로시티(이탈리아 명 치타슬로) 국제연맹으로부터 인증을 받았다는 청산도. 전

남 완도에서 뱃길로 40여분 만에 닿는 섬, 청산도에서 느리게 걷기는 한 시간에 한 대 마을을 돈다는 버스의 경적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버스가 떠나고 제 일을 찾은 닭들의 목청 다듬기는 소박하니 귀엽다. 도로 한복판까지 기

어 올라온 게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한참을 들여다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는 돌담으로 이어진 골목 골목을 기웃

거린다. 구불구불 들어온 길의 입구가 보이지 않는 돌담 옆에서 잠시 혜원 신윤복(申潤福)의 그림 <월하정인>을

 떠올리며 어떤 이들의 은밀한 만남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길가의 들꽃과 변화 없어 보이는 하늘에 수시로 눈길을 주었는데도 어느새 돌아나와야 하는 범바위 전망대에 도착

했다. 청산도 앞바다에 덩그마니 홀로 떠 있는 작은 섬과 맞은편 저 아래로 보이는 낮은 마을이 조용하다. 돌담길

과 해안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느리게 이어지고, 낮은 담과 더 낮게 펼쳐진 구들장 논은 한가로워 보인다. 직선보

다 곡선을, 수직보다 수평을 보는 것이 정서적으로 좋다는 건 애초에 세상이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이겠지. 어느

 미술 평론가가 서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선을 말하며 자연의 곡선을 찾는 이유로 그 안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

기 때문이라고 한 말을 생각하니 사람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이곳에서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지 알 것 같다.

급할 일이 없으니 늑장을 부려보자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빨간 우체통을 발견했다. ‘느림 우체국’, ‘사랑하는

 이에게 소중한 추억을 보내세요. 편지는 1년 후에 배달됩니다.’ 우체통에 새겨진 글귀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느린

 내게 시간을 주는 것 같은데 엽서를 구할 수가 없다. 일 년 후, 또는 십년 후에 전해질 편지라면 무슨 말을 쓸까,

누구에게 보낼까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지나가던 아저씨들의 대화로 생각이 흩어져 버린다.

“연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내 놓고 받을 때쯤엔 이미 남남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 는 걸.”

“그렇지, 일 년이면 그러고도 충분할 시간이지. 부부도 그럴 수 있을 텐데....... . 허허허.”

“그럼, 요즘은 만나는 것도 속전속결, 헤어지는 건 더 속전속결이지.”

서울에서의 생활은 시골에서도 얼뜨기로 자란 내게 여러 가지로 벅찼다. 출근시간 역 근처에서는 흐름을 타지 못

해 어깨를 있는 힘껏 움츠려도 부딪치기 일쑤였고, 신호등의 녹색불이 깜박이면 아예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편했다. 어둠이 내려앉지 못하는 늦은 밤까지 바삐 오가는 이들 속에서 허둥대다보면 어느새 계절도 사람도 바뀌

어 있었다. 그래도 십 수 년을 살다보니 이제는 걸음도 빨라지고 말도 빨라졌다. 심지어 일을 하다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는 밥 먹는 것도 빨라졌다. 그런데 혼자 노력하며 따라갈 수 없는, 빨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타인을 알

아가고 마음을 나누고 가까워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영 서툴고 더디기만 하다. 그래서 때로는 내 마음을 전하기 전

에 서먹한 사이로 굳어지기도 한다.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을 탄생시킨 그 길은 중간에 우뚝 솟은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 건물로 끊어지고 말

았다. ‘서편제길’을 내려오며 돌아본 그 길에서 시간도 마음도 속도를 지키기가 쉽지 않음을 생각한다. 자연의 속

도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에 슬로우 시티라는 이름하에 느리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리라.

생활의 속도는 여기서 더 느려지는 것이 곤란하겠지만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은 그냥 생긴 대로

 좀 느리게, 대신 오래오래 인연을 맺어가면 안될까. 대신 만났다 헤어지는 시간으로도 충분하다는 일 년, 그 시간

보다 더 오래 옆에 있어주는 이들에게 몸도 마음도 느린 나의 상태를 넌지시 알려주어야 할 것 같다. 누군가는 마

음 전하는 것이 너무 느려서 아직까지 짝을 못 구한 거라고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아마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 마음은 여전히 슬로시티에 있으므로.

 

수필과 비평. 2011.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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