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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딩첩첩도    
글쓴이 : 이원예    19-08-08 20:10    조회 : 3,855

 도타운 햇살에 일광욕을 끝낸 빌딩사이로 모색이 스며듭니다. 한나절에는 차분하던 길이 두런거리고, 선잠을 깬 아이처럼 금방 소란스러워 지네요. 에서 동으로의 이동, 그것이 활기의 시작인 듯합니다. 나는 가끔씩 이 길을 지나는데 사람들은 이 길을 테헤란 로라고 부릅니다. ‘강남대로 도산대로와 함께 강남구를 가로지르는 간선도로입니다. 인체로 치면 강남의 동맥쯤으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왕복 10차선의 넓고 긴 도로는 대로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차가 빠져 나갈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동생과 수다를 떨다 퇴근 시간을 가늠하지 못한 탓입니다. 앞뒤는 물론이고 옆모습도 바쁜 인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지된 장면입니다. 한갓진 이면도로를 힐끗거리다 포기하고 차라리 경치 삼매에 빠지기로 합니다.

  어둑어둑함과는 반비례로 센서가 작동되는 가로등이 하나 둘 빛을 물기 시작하면, 나와 이 거리 사이에 드리워진 것은 빼곡한 빌딩들에 감기는 안개 같은 빛의 아우라입니다. 이 순간 빌딩들은 해무를 걸고 있는 산맥처럼 멋진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밤의 세상을 달관하는 달빛이나 별빛 아래서는 느낄 수 없는 운치이지요. 이럴 때면 정체된 도로나 길을 재촉하는 경적소리, 이명 같은 소음조차 배경이 되어줍니다.

  나의 이런 미술적 상상은 순전히 <연강첩첩도>의 영향일 것입니다. 연강첩첩도는 아주 오래전에 선물 받은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던 수묵화입니다. 먹으로 명암만 표현했는데도 중중첩첩 자연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걸작입니다. 구름을 걸친 산이 겹겹이 둘려져 있어, 그 모습이 마치 병풍을 여러 겹 두르고 있는 것 같아 붙인 이름이라고 화가가 말했지요. 자동차 안에서 보는 거리의 모습을 그렇게 겹쳐 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빌딩 첩첩도疊疊圖를 감상하는 중입니다.

  ‘삼릉로三稜路란 옛 이름은 흐르는 세월 속에 기억으로만 남았습니다. 세파 탓이지요. 예전에 이란과 수교를 시작할 때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서울시가 자매결연을 했는데, 그때 삼릉이란 고풍스러운 이름 대신 테헤란으로 고쳐지었다 합니다. 벌써 40여 년이 넘었네요.

  보석상에 진열된 화려한 보석들을 보면서 굳이 원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강남은 한 때 원석을 품은 광맥이었습니다. 광맥을 찾은 사람들은 신세계를 찾은 듯 분답하게 모여 들었고요. 선창의 파시 같이 펄떡이는 생동감이 묻어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지축을 갈아엎는 포크레인 소리 드높았고, 매캐한 시멘트 냄새에 황토 빛은 점점 묻혀 갔습니다. 강바람에 산들대던 들판의 초록들도 개발이란 거센 바람에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몇몇 자연부락은 개발을 투기하다 결국 유혹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대지는 요동치고 직육면체의 늘씬한 빌딩들은 새로운 이름표를 반짝이며, 출중한 맵시를 뽐내었지요.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향의 조부님은 외출하실 때 갓과 두루마기를 찾으셨습니다. 갓과 빌딩, 노인과 속도, 문명의 차이는 이곳과 고향의 거리만큼이나 길었나 봅니다.

  철근과 시멘트가 뼈대이며 신체이다 보니 회색도시라고, 사람들의 입방아를 노래처럼 들었습니다만, 저마다 꿈을 좆아 이곳을 찾습니다. 누군가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명문교를 찾아서,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 테헤란 벨리라는 이름에, 또 어떤 이는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서 뷰티 벨리를 찾아, 상종가를 향해가는 주가곡선처럼 사람들의 욕망도 가파르게 뛰어 올랐습니다. 그 세월 동안 강남의 몸값은 십만 배나 뛰었고, 시간차를 두고 세상의 중심을 향하는 강남의 건설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을 반드시 도에 지나치는 위험한 것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라는 글귀에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탐내고 지향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이 거리에 익숙한 사람은 아닙니다. 천리나 먼 부산 촌(?)사람이었답니다. 10여년 전 어는 겨울 밤, 이 거리와 처음으로 안면을 틔었지요. 그 무렵의 나는 마르지 않은 수묵화처럼 몸과 마음이 무겁고 어두웠습니다. 일흔 둘, 아쉬운 나이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정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서울 근교의 호스피스 병동에 여장을 풀고 있었는데, 이미 우울증 진단을 받아버린 나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셈하는 하루하루는 지독한 통증이었습니다.

  병동의 크리스마스트리에 휘감긴 전등이 여름밤 은하수만큼 어지럽던 어느 날, 지인들로부터 강남의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날은 몹시도 추웠습니다. 강남의 지리를 몰랐던 나는 휴대폰으로 실시간 안내를 받아가며 조금 소란스럽게 테헤란로에 스며들고 있었지요. 대로변은 대체로 조용했고, 여느 도시처럼 평범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리에 처음 나타난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무언가 모르게 바빠 보였고, 알려준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는 먼 길을 온 여행객처럼 나른한 피로감마저 덮쳤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몇 년 후 다시 테헤란로를 찾았을 때는 기시감조차 없는 낮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이 거리와 지난날을 만들어 가는 오늘 날은 겨울 추위에 보리밭 다지듯 터를 다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길을 재촉하는 경적소리를 잔소리처럼 들으며, 그럭저럭 빠져나온 테헤란로의 모습을 뒤 돌아 봅니다. 삭막함이라는 태생적 유전자를 안고 솟아난 빌딩 숲에 어둠의 붓질이 한창입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빚어낸 대한민국 일 번지, 감히 호수號數를 짐작할 수 없는 그림 안에 나 또한 한 점 풍경으로 녹아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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