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기는 어려워
진연후
더하기보다 빼기가 어렵고 찌기보다 빼기가 훨씬 힘들다. 세자릿수 계산이나 뱃살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힘을 좀 빼세요. 아니 왜 이렇게 힘을 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팔이 아프죠. 다리엔 힘을 주고 중심을 잡아야 몸이 흔들리지 않죠.”
새로 시작한 운동에서 코치가 수십 번 강조한 말이다. 힘을 빼라는 말은 뭔가 시작할 때마다 듣는 소리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힘을 빼라는 주문. 누군 몰라서 그러나, 힘이 안 빠지는 걸 어쩌라고. 그 힘이 어디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내 몸인데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속으로만 궁시렁거린다.
오래 전 폼이 예뻐야 한다고 실내 스키장에 다닌 적이 있다. 폴을 잡는 법과 활강할 때 다리 모양 잡기, 그리고 넘어지는 방법까지 배웠다. 실내 연습장이니 길이도 짧고 경사도 약하고 위험요소도 없건만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스키 신발을 신은 채 앉았다 일어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걸음마 연습용 로봇같은 내게 강사가 처음 한 말은 몸에서 힘을 빼라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팔 다리에 힘을 주고 있다가 부딪치거나 넘어지면 큰일 난다고. 도대체 몸의 어디에 힘을 주고 어떻게 균형을 잡고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라는 것이 가장 힘든 주문이었다.
수영을 배우러 다니면서도 발차기를 연습할 땐 힘이 없다고 지적을 받고, 물속에서는 힘을 빼라는 주문을 받았다. 서너 달이 지나도 몸이 여전히 뻣뻣하자 출석률이 가장 좋은데도 이렇게 뜨지 않는 사람은 10년 강사 생활에 처음 본다며, 제발 몸에서 힘 좀 빼라고 여선생이 아예 사정을 했다. 발차기에 없는 힘이 온통 팔 다리에 집중되어 있어 물에 뜨지를 않는지, 아무튼 온몸이 경직되어 있어 킥판이 없이는 물 위에서 수평으로 떠 있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걷기를 굳이 물속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그 뒤로 몸을 좀 유연하게 만들고자 할 때마다 나에게 쏟아지는 주문은 한결같았다. 댄스를 배우러 가도, 요가를 배우러 가도 강사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스트레칭조차 제대로 안 된다며 제발 몸에서 힘 좀 빼라고, 왜 그렇게 온 몸에 힘을 꽉 주고 있느냐고 답답해했다.
아이가 글씨를 쓰게 되기까지는 손목과 손가락의 힘을 조절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무조건 잡아서 힘있게 휘두르는 건 심만 부러뜨릴 뿐이다. 악기를 배우거나 노래를 배울 때도 힘을 주어야 하는 곳이 있고 빼야 하는 곳이 있단다. 힘을 빼고 노래 부르는 데 35년이 걸렸다는 어느 가수의 이야기에서 빼기의 힘을 생각한다.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쓸모없는 힘을 없앤 다음에야 진짜 힘을 갖게 되고, 다시 그것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진짜 실력자가 되는구나.
사는 곳이나 하는 일 따위의 궁금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나“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 등은 또다른 힘의 모습이다. “오선생, 이래봬도 나 대학 나온 사람이오.” “이래봬도 나 안동 권씨요!”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권씨가 하는 말이다. 현재는 직장도 잃고 집도 없는 전과자이기에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의 말이다.
내 몸인데도 신체부위별로 힘을 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마음은 오죽할까. 어깨에 힘을 많이 주고 강함을 보이고자 애쓰는 사람들. 그들도 힘을 빼는 것이 쉽지 않은 걸까, 아님 본인이 무엇에 힘을 주고 있는지 인식을 못 하는 걸까. 방향도 목표도 벗어난 안쓰러운 힘을 갖고 있는 이들. 남보다 많이 가졌다고 남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다고, 뭐든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어 힘을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들과의 관계 맺기는 영 불편했다.
존경 받는 이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카리스마라고 했던가. 진짜 힘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니, 밥 안 먹었어요, 며칠 굶었어요?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 이젠 좀 자신있게, 있는 힘껏 때려봐요.”
경제력 등 다른 힘은 거리가 멀고 그저 몸 하나는 어떻게 힘을 만들어 제대로 빼기 단계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올까. 얼마 전부터 힘 좀 주라는 코치의 말을 들으며 다리에 힘을 주어보긴 하는데...... .
수필과 비평. 201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