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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을 때    
글쓴이 : 진연후    19-11-10 21:29    조회 : 12,733

좋을 때

진연후

좋을 때다. 무심결에 나온 말 끝에 한숨이 따라온다. 내게도 올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왔다갔을까?

버스 정류장에서 남녀가 입맞춤을 하고 있다. 갓 스물이 되었을까 말까한 앳된 모습이다. 드라마 속 배우들의 키스장면 보는 것도 민망한데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니! 얼른 고개를 돌린다. 하필 버스 오는 방향에 서 있으니 조바심에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이젠 끝났겠지싶어 다시 돌아본다. 아직도 뒤통수가 보인다.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이쪽 저쪽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타려던 버스가 왔다. 그 둘은 여전히 서로를 안고 있다. 버스에 올라서 출발하는 순간에 그들을 다시 보았다. 아쉬움 10%를 담은 90%의 행복한 표정이다.

내가 20대이던 8,90년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버스정류장 풍경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이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준다는데 함께 걷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던지... . 정류장에서 어색하게 서 있을 걸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학원 수업시간, 누군가가 꺼낸 아이돌 이야기에 순식간에 고음의 랩이 튀어 오른다. 본인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이름이 나오니 여학생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말을 쏟아낸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면서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지금 그들을 만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저 좋단다. 생각만으로도... . 같은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바로 친구가 되어서는 콘서트 예매 계획이며 신상에 관한 이야기로 수업 후 쉬는 시간을 예약한다.

얼마나 좋으면 길거리에서 입을 맞추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까? 얼마나 좋아하면 생각만으로도 온 몸이 들썩이며 발표시간엔 일자로 다문 입들이 열려서는 다물어지지 않는 걸까? 생각만으로도 행복하고 보기만 해도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일이, 그런 사람이 있구나. 주위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감정을 맘껏 표현하고 좋은 기분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이들을 보면 슬며시 따라 웃다가 머쓱해진다.

창에 비친 여자를 본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저 여자. 오늘 여자는 몇 번쯤 소리내어 웃었을까? 누구에게 애정 가득한 눈빛을 보낸 기억이 까마득하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서툰 건 나이 탓일까, 시대 탓일까. 아님 세포 문제인가. 어른들은 언제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낼까. 혹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가 있다면 뭐라고 할지. 허리를 움켜쥐고 눈물 찔끔 흘려가며 웃었던 적은 언제였는지. 감정 표현은 어느 정도까지 해 보았더라. 표현이 서툰 성격에 사람도 상황도 가리다보니 자꾸 더 움츠리고 망설이는 것들 투성이다. 이쯤 되니 애초에 그런 세포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몸에서 연애세포 비슷한 감정세포들은 자라나지 못하고 소멸했나보다.

좋을 때다. 그 소리를 들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내일이면 만날 친구나 애인과 잠깐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 살아있으면 늘 좋을 때다. 언젠가 한 번쯤은 내게도 그 좋을 때가 다시 올까. 나도 버스 정류장에서 행복한 작별을 해보고 싶다. 30여 년 전 제대로(?) 못 해 본 작별방식이 아쉽다.


시에 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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