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슬픈가, 님이 미운가
이성화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목련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봄이면 순백의 웨딩드레스인양 그 자태를 뽐냈겠지만, 내 기억에는 목련꽃이 아름다운 적이 없었다. 꽃이 필 때보다 꽃이 질 때 기억이 더 강렬해서 그럴 게다. 하얀 꽃이 떨어지면 변색된 바나나 껍질처럼 누런 황토색으로 마당을 더럽혔다. 밟으면 솜이불처럼 폭신할 것 같았던 흰 꽃은 옆집 누렁이 똥마냥 발바닥에 들러붙었다. 엄마는 그런 꽃잎을 정말 똥이라도 되는 양 인상을 쓰며 벅벅 쓸어내곤 했다.
친정엄마는 칠십 평생 꽃 좋은 줄 모르겠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머리로는 인식하는 아름다움을 감정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우울증의 한 가지 특징이라고 했다. 어쩌면 엄마는 우울증을 앓았을지도 모르겠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과 빈곤한 삶 속에서 꽃도 자식도 예쁘게 느낄 수 없었을 테다.
집안일에 무심했던 아버지가 마당 한번 쓸었을 리 없으니 언젠가 뽑혀나간 목련나무는 그저 일거리 하나 갖다 버린 정도였겠다.
자식이 아무리 예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인간이기에 홀로 외로운 시간이 있다. 그럴 때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이 조금만 보듬어 주어도 위안이 되었을 텐데, 그 시절 남자들이 의례 그랬듯 무심한 가장 치다꺼리에 허리가 휘는 날들이었을 테다. 오히려 아버지가 집에 한동안 안 오시면 우린 오히려 편안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렇게 집을 비울 때마다 부산에 계셨다는데 그곳에 딴 살림이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안 일이었다. 그러면서 적반하장으로 의처증까지 있었으니 엄마 얼굴이 그늘져 있었던 건 당연했다.
엄마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우는 날은 나까지 눈물 보태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 숨어 울었다. 눈물 너머 마당에는 목련꽃잎만 시커멓게 문드러졌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얻은 후에도 아버지는 그다지 변한 게 없었고, 늦은 나이에 힘들게 남동생을 낳은 엄마는 억척스러워졌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아버지가 세상 떠나시고 나니 엄마는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내가 만약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을 낳지 않았더라면, 사는 게 팍팍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엄마의 마음이 삶으로 다가오던 때였다.
손주들을 돌보는 엄마의 표정을 보며 “올봄엔 꽃놀이 한번 가야겠다.” 했었다. 엄마도 어쩜 “아이고, 내 새끼들 꽃처럼 예쁘다.” 하고 좋아했을 텐데.
아버지를 오랫동안 간병 하느라 지쳤겠지만, 강인했던 엄마는 오래 사실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의사의 3개월 선고에도 ‘울 엄마를 몰라서 하는 소리지, 곧 일어나실 텐데’ 하며 실감하지 못 했다. 봄꽃이 한창이었던 한 계절을 꼬박 병실에서 보낸 엄마는 어버이날 떠나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를 학교 마치는 시간에 데리고 오던 중이었다. 문득 “요놈 입학할 때까지 살려나?” 했던 엄마한테 당연한 얘길 입 아프게 한다며 삐죽거렸던 생각이 났다. 작은딸의 등하교는 엄마가 돌봐주셨지만 끝내 막내아들 입학은 보지 못하셨다.
유난히 예뻐했던 손녀 손을 잡고 이 길을 오갔을 엄마…. 그때는 이 길이 어땠을까, 벚꽃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까. 꽃을 보는 내 눈길을 따라가던 막내가 사진을 찍어달란다. 두 팔을 번쩍 들어 만세를 하는 개구진 미소가 흩날리는 벚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그날 내 카톡 프로필사진에 난생처음 꽃 사진이 올라갔다.
엄마처럼 꽃 예쁜 줄 모르고 살았던 내게 올봄은 유난히 꽃바람이 분다. 잊을만하면 꿈속으로 찾아오는 엄마도 이젠 웃으며 꽃바람 맞고 계시면 좋으련만.
2019년 가을 <문학사계>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