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의 노래
오길순
나는 불에 타지도 않고/물에 침몰하지도 않는다네/태양처럼 /별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록/나는 영원한 불사조라네.
가해자 측은 인터넷에 엄포를 놓았다. 무고죄로 고소하겠다느니, 청와대에 청원하겠다느니...최상을 상징하는 아이디로 겁박 할 때는 죄 지은 자가 주인 같았다. 가해자는 2017년 7월, 1심에 승소하더니 고무되었나 보았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 의 작품집을 이십년 가까이 활용하고도 절대승소를 하고는 겁박까지 하는 그들이 특별해 보였다.
제발 그리하여 70작품 가까운 표절의 진실을 밝히라 하니 순식간에 줄행랑을 쳤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 도마뱀 꼬리처럼 ‘삭제되었습니다’만 남겨놓고 도망간 몸통은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다.
2018년 7월11일, ‘신경숙 표절 사건’1심판관은 원고번호를 맨 먼저 읊었다. 그리고는 곧 ‘원고 오길순 패소판결’을 내렸다. 백반덩이를 뿌려야 독사가 고개 들지 못하리라. 쏘가리에 소금 뿌리듯, 생명의 싹을 으깨야 얼이 빠지리라. 100도씨 물을 부어야 뇌진탕이 될 거라는 학습된 선언이 원고를 맨 먼저 판결한 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재판 끝났는데도 왜들 가지 않느냐’며 솔로몬처럼 은근한 웃음으로 공청석을 향해 판사가 물었던 건 아닐까?
지난 2년여 동안, 1심판관이 세 번이나 바뀔 때는 법원이 심사숙고하는 줄 알았다. 지인들은 ‘드디어 대한민국 양심시대가 열리나보다’며 환호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수상을 많이 한 작가로서 무명작가의 원작을 볼 일이 없다며 외면했다. 유명작가에게 표절을 당했으니 영광으로 알라는 말도 같았다.
가까운 문인들은 숨이 가빴다. ‘뻔한 표절을 왜 그리 질질 끄느냐?’고 물었다. 재판부를 현혹하는 피고며, 아이디어 운운하는 피고 측 변호사며, 이를 수용한 판관이며, 3박자를 꿰맞추느라 그리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을까?
가해자 측 변호사는 치매어머니를 잃는 것은 일반적이며, 문장대 문장이 아니니, 차용과 표절은 다르다고 변호했다. 차용은 했으나 표절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가해자는 민사 시효 3년이 끝났으니 사면되었다는 의미로 대답했다. 주제며 핵심 언어며 핵심구절 등 66편 그 방대한 수필작품의 디엔에이를 소설화 하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아버지 사투리까지 동일하게 가져간 것은 무엇으로 해명할 것인가?
피고 측은 어머니도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친구 어머니이야기이다,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이다’ 등 대답을 계속 바꾸어 나갔다. 스스로도 주체하기 어려운 거짓말인 듯 앞뒤가 맞지 않았다. 누군가는 누구인가?
위대한 문호도 헤아릴 수 없는 값을 치른 보물이 경험이라 했다. 진정 어머니를 찾아 헤맨 경험이 가해자에게 있었는가? 헤아릴 수 없는 경험의 값을 치룬 후, <<엄마를 부탁해>>로 썼는가? 특히 스물 댓 작품이나 되는 다른 작가들의 글을 ‘치매문학’이라며 피해자에게 던져올 때는 폭탄이 따로 없었다.
‘이 많은 치매문학 모두 가해자가 표절한 글이냐?’며 역공을 가할 때는 도둑이 도둑질을 얼마나 했겠느냐고 주인에게 묻는 도둑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치매문학, 생소하고도 창조적인 이름은 표절의 유식함을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사모곡>과 같은 글은 없었다. 스물 댓 작품 어디에도 <<목동은 그 후 어찌 살았을까>>와 유사한 디엔에이는 없었다. 대법원 판례를 내세운 변호사는 아이디어는 가져가도 된다고 가해자를 변호했다. 한 술 더 뜬 1심판관이 “아이디어는 차용해도 된다는 말이지요?”피고 측 변호사에게 질문할 때는 심판의 ‘가이드라인’이 그러한가 싶었다. 미소까지 띤 판관에게 과연 정의라는 말은 살아 있는지 묻고 싶었다. “재판관님, 수필집 한 권을 각색했는데도 아이디어 차용인가요?”
“피해자의 다른 작품들까지도 모두 섭렵했는데도 표절이 아닌가요?”
“피해자의 일생이 가해자에게는 겨우 아이디어인가요?”
“그 방대한 내용을 진정 비교분석 하셨는가요?”
말리는 시누이, 시어미보다 어떻다더니 그들이 고부간처럼 동조한 한통속으로 보였다.
칡뿌리는 한 겨울에도 몸통을 키운다. 추위가 혹독할 때 더욱 뿌리가 깊어진다. 3년 가까이 그림자도 비치지 못한 가해자는 진즉 무릎 꿇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해자를 변명한 거짓 비평가도 문학사에 이름을 판 매명가로 기억될 것이다.
이기고도 진, 아니 지고도 이긴 이 싸움은 불사조의 노래가 될 것이다.
<<수필과 비평>>2020.5(2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