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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 도는 팽이; 제15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금상수상작    
글쓴이 : 장석창    20-06-18 21:44    조회 : 5,162

마주 도는 팽이

 

집에 오니 아들이 팽이를 돌리고 있었다. 요즈음 팽이는 내가 어릴 적 돌리던 줄팽이와는 많이 달랐다. 실내에서도 층간소음 없이 돌릴 수 있도록 바닥에 놓는 팽이 판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발사 장치에 팽이를 물린 후 부착된 끈을 잡아당기면 거기에서 분리된 팽이가 회전력을 얻어 판 위에서 돌아간다. 아들은 흔들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돌아가는 팽이가 신기한 듯 연신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그머니 아들에게 다가갔다. 판위에는 한 쌍의 팽이가 사이좋게 마주 돌고 있었다. 혹시 상대방이 먼저 쓰러지지나 않을까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듯했다.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온 부부처럼.

판위에서 돌아가는 팽이의 모습은 우리의 인생여정과 흡사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목청을 돋우며 우는 아이처럼 '탁'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라는 판위에 던져진 팽이는 힘찬 추진력을 얻고 돌아간다. 팽이의 생명력은 놀랍다. 기울어진 팽이도 회전력만 있으면 바로 쓰러지지 않고 일어선다. 판위에서 이리저리 돌면서 벽에 부딪혀 밀려나기도 하고, 다른 팽이에 부딪혀 비틀거리기도 한다. 좌우로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지만 이내 바로 서서 또 열심히 돌아간다. 하지만 모든 힘을 소진한 팽이는 심하게 요동치다가 결국 쓰러져 멈춘다. 마지막 순간까지 팽이의 꿈은 한결같다.

‘다시 일어서고 싶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람의 소망일 게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갓난아이가 걷다가 넘어졌을 때, 열심히 공부했던 수험생이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 조기 퇴직한 중년 가장이 야심차게 시작한 자영업을 폐업했을 때, 행복한 노년을 보내던 노인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어느 노(老)부부 이야기다. 하루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노부부가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마치 영국 신사 부부 같았다. 감색 정장 차림의 70대 노신사는 훤칠한 키에 자세도 꼿꼿하셨다. 백발이 무성한 머리카락은 뒤로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희멀건 얼굴에는 잡티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부는 닮아간다고 했던가? 노부인의 단아한 옷차림과 이지적인 얼굴에서도 고상함이 물씬 풍겨 나왔다. 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후 노신사가 환자용 의자에 앉으셨다. 앉아있는 중에도 노부부는 서로의 손을 살포시 잡고 계셨다.

‘어쩜, 두 분 모두 곱게 늙으셨다. 지성미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노신사는 치골상부 방광루설치술 후 아랫배에 소변 줄을 달고 계셨다. ‘영국 신사의 몸에 소변 줄이라니!’ 의사인 내가 생각해도 아이러니했다. 3년 전에 받은 대장암 수술 후유증에 다른 문제가 겹쳐서 방광 무력증이 온 듯했다. 이 경우 하복부 피부에서 방광까지 구멍을 뚫고 소변 줄을 설치하기도 하는데, 합병증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은 소변 줄을 바꿔줘야 한다.

“제가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대장암 치료는 어떻게 받고 계시죠?”

“항암치료는 모두 끝나고, 정기 검진만 받고 있어요.”

“그러세요? 일단 바지를 벗고 침대에 누우시지요. 사모님은 잠시 나가 계시고요.”

노신사가 웃옷과 바지를 벗자 노부인이 공손히 받아들고 말씀하셨다.

“제가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바깥어른이 불안해하셔서요.”

나에게는 처음 받는 시술이므로 그러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면 그냥 계셔도 됩니다.”

노부인은 노신사에게 옆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 따뜻한 눈길을 보내셨고, 긴장한 표정이었던 노신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을 바라본 후 지그시 눈을 감으셨다. 시술이 끝나자 노부부는 다시 정답게 손을 잡고 진료실 밖으로 나가셨다.

노부부가 미소 띤 얼굴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모습에는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에는 열정과 조급함 대신에 배려와 인내가, 긴장과 숨 막힘 대신에 여유와 편안함이, 애증의 회오리 대신에 잔잔한 흐름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젊은 시절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남녀 관계를 만들어가게 한다. 동반자로서 살아온 오랜 시간들, 그 시간 동안 내면에 쌓아온 많은 추억과 감정들이 숙성되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나는 이 노부부에게서 서로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신뢰를 보았다. 그것은 수십 년 묵은 와인에서만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고급스러움이었다. 요즈음 나는 노인 환자들을 보면서 이삼십 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 후로도 노부부는 매달 함께 내원하셨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분들과 점점 친해지면서 사적인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지난 시대를 살아온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 노부부도 험난한 세상풍파를 겪어온 분들이었다. 그때마다 서로를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셨다고 한다. 노부인도 10년 전에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았는데 노신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1년 정도 다니시던 노부부의 발길이 갑자기 끊어졌다. 정기적으로 오시던 노인 환자분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예감은 현실이었다. 1년쯤 지난 후, 노신사만 홀로 나타나셨다. 푹 꺼진 눈 밑에 불룩한 광대뼈는 미라를 연상시켰고, 앙상한 목 표면에 도드라진 경정맥은 그간의 고난을 짐작케 했다.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노신사가 아니었다. 그저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할아버지였다.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머뭇거리던 노신사가 말씀을 시작하셨다.

“저어, 부탁이 하나 있어서 왔소. 짐작하시겠지만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그래서 얘긴데…, 사실 대장암 수술 후 지금까지 내 남성이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소. 그래도 그러려니 했소. 할멈 몸 상태도 있고, 부부생활 없이도 충분히 행복했고. 음…, 좋은 약이 있으면 하나 처방해 주시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면 처음에는 이를 부정한다. 다가올 운명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가끔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메말라가는 심신을 확인하면서 점점 우울해지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인다. 노신사도 그랬을 것이다. 살을 에는 통증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영혼마저 갉아먹는 암세포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면 노부인과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온 지난날이 떠올랐다. 마주 도는 팽이가 있으매 삶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팽이의 놀라운 복원력을 기대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희망 끝에는 언제나 절망이 뒤따랐다. 슬펐다. 노부인과 헤어짐이 슬펐고, 노부인의 눈물을 보니 슬펐다. 눈물도 물 위에 떨어진 잉크 방울 같아서,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희석된다는 또 다른 슬픔에 더욱 슬펐다. 그러던 중, 고갈되어 가는 자신의 몸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이놈, 참 오랫동안 쓸모없이 붙어 있었군. 운명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이 녀석은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 심하게 요동치며 일어서려는 팽이의 몸부림처럼, 노신사는 다시 일어선 남성을 통해서 당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얼마나 망설이다가 찾아오셨을까? 비00라 같은 약이 있지만 노신사의 몸 상태에서 안전할까? 효과는 있을까? 약을 드시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마저 단축시키지 않을까? 휴우…. 맞다! 테스트할 때 남성에 놓는 주사제가 있었지!’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노신사의 간절한 소원을 져버릴 수 없었던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르신의 몸 상태에서는 비00라를 드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대신 제가 주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노신사의 남성은 살이 빠져서 산봉우리처럼 융기된 치골 밑에 쓰러진 한 그루의 고목(枯木)이었다. 나는 일단 시험용량을 주사하고 기다렸다. 이 주사액이 단비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대로였다. ‘정녕 회생하기 힘든 것인가?’ 조금 더 주사했다. 드디어 노신사의 남성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한 상태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때를 기다려서 노신사의 남성에 초음파 프로브(probe)를 대고 모니터에 해면체 동맥의 박동을 잡았다.

“보세요. 어르신의 남성이 아직 펄펄 뛰고 있지요!”

일어선 남성과 동맥의 박동을 직접 확인한 노신사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몇 분 후, 노신사의 남성은 다시 수그러졌다.

고개 숙인 남성 문제로 비뇨의학과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사연이 있다. 흔히 고개 숙인 남성을 생명과는 무관하다고, 혹은 쾌락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폄하해 버리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폐경이 된 여성이 심한 상실감에 빠지듯, 고개 숙인 남성은 그들에게 있어서 존재 자체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후 노부인이 찾아오셨다. 간단한 진료도 받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란다.

“바깥어른이 석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날은 원장님께 혼자 가시겠다고 우기시더니, 다녀오신 후 기분이 무척 좋아지시고 몸 상태도 호전되셨거든요. 비록 며칠뿐이었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진 노부인을 바라보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시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노부인이 떠난 진료실은 고요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려했던 팽이의 절절함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뒤이어 내게 다가온 것은 짝을 잃고 홀로 도는 팽이의 서글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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