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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등의 짐    
글쓴이 : 박병률    20-06-30 23:39    조회 : 6,451

                                                        내 등의 짐

 

 “쌀이 왔시유, 저녁때 도착혀유. 몇층이유?”

  택배 기사의 전화를 받고 4층이라고 말하자 엘리베이터가 있냐고 또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했더니 택배 기사가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고향에서 형님이 농사를 짓는데 쌀 한 가마가 온 것이다. 요즈음 장마철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오후가 되자 빗방울이 굵어지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날이 어둑어둑할 때 창밖을 바라보며 쌀이 곧 올 텐데 비가 멎으면 좋으련만.” 혼잣말을 했다. 내 옆에 있던 딸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택배 기사가 쌀을 집 앞에 갖다 놓을 테지만 아빠는 사서 고생해요. 우리 아빤 암튼 못 말려!”

  딸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택배 기사의 전화를 받고 쌀이 왔는데 몇 층이냐, 엘리베이터가 있느냐?’라는 택배 기사의 음성이 귓전에 종일 맴돌아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듯딸한테 화살을 돌렸다.

  “쌀 한 가마를 4층까지 올리려면 누군가 힘들지 않겠니? 쌀을 운반하기 좋게 자루 4개로 나눴다더라.”

  딸하고 몇 마디 주고받을 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택배 기사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집 앞에 왔시유, 문 열어줘유.”

  택배 기사 전화를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70 중반쯤 보이는 노인이 현관 앞에 쌀자루를 수북이 쌓아놓고 있었다. 노인한테 다가가서 비가 와서 힘들지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노인은 대꾸도 없이 쌀 한 자루를 어깨에 들쳐 맸다. 노인이 1층 계단을 막 돌아설 때였다.

  노인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쌀자루 하나를 등에 지고 작은 소리로 짐이요!”라고 외치며 노인 뒤를 따랐다. 노인이 뒤를 힐끗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집 앞에 도착했다. 내가 씩 웃으면서 노인이 내려놓은 쌀자루 위에 내 짐을 부렸다.

  이왕에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은 한사코 말렸지만, 마지막 남은 쌀자루를 지고 노인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오를수록 노인은 다리가 휘청거리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노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어 계단 뒤처져서 따라가는 나도 이까짓 쌀 한 자루쯤이야!” 가볍게 생각했는데 처음과 다르게 3층을 지날 때 내 등에 짐의 무게가 자꾸 늘어나는 것 같았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니 어느새 문 앞에 도착했다. 노인과 나, 쌀자루를 내려놓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노인은 우리 집이 마지막 코스라며 땀을 흘린 뒤 달콤한 휴식을 누리는 듯 여유를 부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찬물 한 잔을 따라다가 노인 손에 쥐어 주면서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일부러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있다는데 할아버지는 돈도 벌고 운동도 하니까 좋지요?”

  “돈 버는디 쉬운게 있남유.”

  노인은 말끝을 흐리며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다리근육을 내보였다. 그 후 오른팔을 펴서 안으로 구부리며 볼록하게 솟은 알통을 자랑했다. 내가 알통을 만지면서제가 앞으로 안 도와줘도 되겠네요.”라고 하자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후 노인한테 코가 꿰었다. 노인은 사업 실패 후 택배 일을 시작했다는데 형님이 쌀을 부칠 때마다 한 자루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집 근처에서 사업을 하는데 택배 상자 하나 정도는 가게에 내려놓았다. “퇴근하면서 가져가유, 복받을끼유.” 노인이 웃으면서 가게 문을 밀고 들어오는데 어디 막을 방법이 있겠는가.

  한번은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가던 참이었다. 노인한테 고구마 한 상자가 왔다는 전화를 받고 1층 현관 앞에 놔두라고 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고구마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노인한테 전화했더니 내가 바빠서 4층까지 못갔시유, 수고 혀유.”라고 2층 구석에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구마 상자를 등에 지고 집으로 향할 때 땀 흘리며 농사를 짓는 형님 얼굴이 어른거리고, 택배 노인이 떠올랐다.

  택배 노인이 우리 집에 처음으로 쌀 배달 왔을 때 쌀자루를 지고 4층까지 올라가려고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타박을 하자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내밀었다. 내 등에 짐을 지고 노인 뒤를 따라가는데 중간쯤 오르자 노인은 다리가 흔들리고 숨소리는 거칠었지. 내가 짐을 지지 안았다면 남의 짐 무게를 느끼지 못했을 텐데, 내 등의 짐은 매듭이 풀리듯 내 안에 자리를 잡은 단단한 의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으므로.

 

                                                                 한국산문 20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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