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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가 내게 준 것    
글쓴이 : 박영화    20-08-21 00:19    조회 : 5,485

5%가 내게 준 것

 

박영화

시애틀 남쪽, ‘렌톤이란 도시에 음식점을 열었다. 남의 식당 열 곳을 전전하다 이루어낸 쾌거였다. 출근길에 ‘Asia Ginger’라고 쓰인 간판을 마주할 때면 첫 데이트를 앞둔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국에 입성한 초반부터 나는 현지인들이 주 고객인 곳에서 경력을 쌓았다. 요리비법이나 운영방식을 배워 언젠가는 가게를 차릴 요량이었다. 다행히 계획한 대로 데리야키 전문점을 오픈할 수 있었다. 우리 식당의 메인은 닭고기였다. 치킨의 허벅지살을 얇게 펴서 구운 후, 데리야키 소스를 뿌려 샐러드와 밥까지 한 접시에 담아내는 일품요리이다. 이 지역에서 데리야키라 명명되는 이 음식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초기 일본 이민자를 통해 들어온 야키(굽는)조리법에 중국식 웤(속이 움푹한 프라이팬을 이용한 요리) 기법이 혼합되었다. 이후, 주로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요리방법이 확대되었다. 그야말로 한··일 특성이 뒤섞인 아시안 퓨전이 된 것이다.

장사를 시작한 지 두 달 때 쯤 지나서였다. 동종업의 흐름을 인터넷 한인 커뮤니티에서 얻었는데, 모두가 천정부지로 오른 재료비 때문에 고민이었다. 원가가 높아진다고 밥값을 올릴 수 없는 심정은 너나 할 것 없이 같았다. 눈을 부릅뜨고 다듬을 때 버려지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는 소규모 자영업의 특성이 그러하듯 대부분 부부가 운영하고 자녀들까지 합세한 가족 경영 시스템이었다. 되도록 인건비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두 딸애는 어렸고, 남편은 공부 중이었다. 전반적인 운영과 고객 서비스는 나의 몫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은 멕시코계 현지인들을 고용했다. 가족 중 한 명이 주방을 사수하지 못한 업주들은 갑자기 직장을 옮기는 주방장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부엌에선 칼을 쥔 사람이 대장이라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다. 주인은 나였지만, 요리 공간만큼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한 끼 밥을 취급하는 직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설움은 내게도 아픔이자 상처였다. 첫 면접은 마치 대기업 문턱을 넘는 것 같았다. 학력부터 시작해 가정환경 조사를 하는 듯한 주인의 태도에 발가벗겨진 모멸감마저 들었다. 어떤 집에선 부족한 영어를 보완하고자 친절하게 웃으며 근무했던 행동마저 오해를 샀다. 경력이 쌓이면 무덤덤해질 것 같았지만, 고용주와 그에 속한 직원 간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권력 구조의 근간은 상류사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이든 동네밥집이든 WinWin이 살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내 가게를 하게 되면 이러이러 할 것이다라는 수십 편의 시나리오를 마음속에 쓰곤 했다. 서로 배려하며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리가 바뀌니 내 시력과 감각은 초능력을 발휘했다. 시집살이 상처가 많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꼴을 보지 못한다는 말처럼 이상하게도 부족한 점만 눈에 띄었다. 올라선 계단의 층수만큼 시선의 높이도 달라졌다. 몇 명 안 되는 직원이었지만 오로지 내 판단으로 채용하거나 자를 수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팔뚝에 완장을 찬 꼴이었다. 곤봉을 손에 쥘지 지휘봉을 흔들지 갈등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운영이 절실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리는 자영업자들의 한탄스러운 기사들 속에서 나라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너라는 자리는 절벽과 절벽 사이에 놓인 흔들다리를 건너는 일과 같았다. 발을 떼고 마지막 스텝이 맞은편 평지에 닫는 순간까지 발바닥의 힘을 조절해야 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플러스마이너스를 저울질하는 숫자놀음의 연속이었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자는 거창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잔소리로 적절한 비용 절감을 얻어내야 했다.

휴일을 앞둔 금요일 저녁, 직원들과의 티타임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경기침체로 인한 식자재비 상승을 화제에 올렸다. 혹시라도 사장의 간섭이라 여길까 싶어 강력히 요구하지는 못했지만, 수용하는 듯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근검절약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여전히 닭다리 살점이 잘려나갔고 쓸 만한 채소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미묘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숨겨두었던 곤봉이 삐져나올 것 같았다. ‘그들을 내보낸들 상황이 달라질까.’ 고민 끝에 결국 실속 없는 내면의 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버려지는 것들은 기껏해야 5% 내외의 손실이었다. 나는 그것과 주방 식구들의 자율성과 맞바꾸어야 했다. 최대한 부엌 쪽으로 가지 않았고 도매상에 재료를 주문하는 업무를 주방장에게 넘겨주었다. 자산을 투자한 이는 나였지만 경영의 승패는 음식을 담아내는 자신들에게 있다는 자부심을 갖길 바랐다. 임금을 지급하려면 운영이 원만해야 하고 그래야만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상생의 법칙을 이해하길 기대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났다. 원재료 비용은 여전히 과했지만, 어디까지나 계산상이었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조금씩 점심 시간대 손님이 늘어났고 매출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직원들에 대한 나의 무간섭이 음식의 질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5%를 내어주니 그 이상이 되어 돌아왔다. 누구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인간관계의 연쇄반응 같았다. 나는 더하고 빼는 것만이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수와 수 사이에는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종일 테이블을 닦으며 어설픈 발음으로 땡큐, 베리머치를 반복하며 알게 되었다. 우리들은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멋진 서바이벌 팀으로 몇 년을 지냈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금, 그들과 함께 했던 10여 년 전 그 때가 그립기만 하다.

 

2019. 창작산맥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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