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짓다
윤기정
강변을 걷는다. 서산마루에 해가 반쯤 걸렸다. 감호(鑑湖)에 석양이 비스듬히 내려앉아서 물속에 붉은빛 다리 하나 만들었다. 감호는 양평을 흐르는 남한강의 별칭이다. 남한강은 감호 삼십여 리 아래서 북한강과 만나느라 숨 고르다가 흐름이 느려진다. 흐름 늦춘 강의 수면이 거울처럼 아른거려 호수처럼 보인다고 하여 얻은 이름이 감호다. 맑은 날 감호의 해 질 녘 풍경은 석양과 석양이 풀어놓은 빛의 축제다. 구름은 분홍빛 솜사탕처럼 투명하게 환하다. 강물은 수천의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빛나되 작열하지 않는 석경(夕景)에 저무는 시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새움 돋은 나뭇가지 사이로 서산에 걸린 해와 노을에 젖은 구름과 노을에 물든 물결과 흔들리는 오리 몇 마리를 사진에 담는다. 하루를 아퀴 짓는 시간의 색깔과 풍경을 글로써 표현해보고 싶지만, 문장이 따르지 않아서 우선 사진에 담아둔다. 시인이라면 좀 다를까? 얼마 전 양평의 역사문화연구회에서 인사를 나눈 시인에게 사진 몇 장과 함께 안부 문자를 보냈다. 풍경이 곱다며 ‘멋진 삶을 짓는 모습이 부럽다’는 답이 바로 왔다. ‘삶을 짓다’니 역시 표현이 남다르다. ‘짓다’에는 삶의 주체로서 산다는 뜻도 있지 않은가?
재료를 들여 밥, 옷, 집 따위를 만드는 것을 짓는다고 한다. ‘밥, 옷, 집’은 익숙한 말로 바꾸면 ‘衣?食?住’다. 생활에 기본인 세 가지를 만드는 일이 모두 ‘짓다’로 같은 것이 재미있다. ‘기본’이란 말은 ‘중요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짓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 본다. 이름을 짓고, 시도 짓고, 글도 짓고, 짝도 짓고, 농사도 짓고, 약도 짓고, 미소도 짓는다. 이렇게 떠 올려보니 즐거워진다. 온갖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은 ‘짓는 것’이었다. 게다가 ‘삶을 짓는다.’처럼 변주가 가능하니 얼마나 좋은 말인가. ‘희망을 짓는다, 우정을 짓는다.’라고 해서 안 될 법도 없겠다.
부정적 의미의 ‘짓다’는 없을까? 있다. ‘말을 지어내다’는 ‘참(?)하다, 거짓말하다’는 뜻 아닌가? 또 있다. 지으면 안 되는 것, ‘죄를 짓다’가 있다. 좋은 뜻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마뜩잖다. 그냥 말일 뿐이지만 시와 글, 미소 이런 아름다운 것들이 죄와 한 자리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강변길이 끝나는 곳에 덕구실 육교가 있다. 육교를 건너서 자전거 도로에 들어섰다. 멀리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자전거 행렬이 다가오고 있다. 빠른 속도로 이내 곁을 지나쳐 서울 방향으로 내달린다.
무리. 무리도 짓는 거네. 가까운 사람끼리 또는 같은 일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무리를 만드는 것도 ‘짓는 것’이니 이 역시 좋은 말 아닌가? 그러나 무리도 역시 좋은 무리만 있는 게 아니다. TV 드라마 <모래시계>가 우리나라의 밤을 조용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검은 양복의 깍두기 머리들이 멋져 보였는지 당시 청소년들의 장래 희망 1순위가 조폭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호사스러운 생활과 폭력과 불법을 의리로 포장하여 멋짐으로 비치게 한 탓도 있었을 게다. 폭력배가 무리를 짓는 것 그 자체가 불법이니 무리에도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다.
아내는 힘든 일이 닥칠 때면 ‘세상일에는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다’며 빨리 마음을 추스르는 편이다. 그 말처럼 ‘짓다’의 쓰임도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그로 위안 삼을 일이다. 아니 위안이 아니고 그저 그런 현상일 뿐이다. 말도 생명체처럼 나고 바뀌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니 먼 훗날에는 좋은 뜻만 남고 죄를 저지르고 참언을 하는 행위는 다른 말로 바뀔지 모른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고.
좋은 의미의 ‘짓다’만 생각하자. 지금쯤이면 밥 짓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리라. 자식 농사도 그만하니 지었고 노후를 보낼 집도 지었다. 옷 짓는 솜씨가 남다른 아내와 짝을 지어 한 생을 산다. 수년 전 모시 바지저고리를 지어주어 한여름을 쾌적하고 고풍스럽게 지낸 적도 있지 않은가. 텃밭 농사지으며 글 지으며 한세상 살다가 삶을 마무리 짓겠다면 욕심일까? 그에 더해 좋은 글 한 편 남길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수의는 아내가 지어준 모시 바지, 저고리로 할까? 어쩌면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짓는 것이 아닐까? 그림자 앞세우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에세이문학》 2019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