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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책    
글쓴이 : 봉혜선    20-10-02 22:31    조회 : 7,402

낡은 책

 

봉혜선

 

   혼자만의 책이 아닌 공유하는 책에 대해서. 도서관에 비치한 책이 내 것인 양 뿌듯하고 일견 많은 양에 압도되기도 하지만 꺼내 보는 책은 대부분 낡았다. 낡은 책은 부드럽다. 낡은 책을 대하면 혼자 읽는 데서 오는 외로움은 자취를 감춘다.

   책이 주는 위안에 더해 책을 읽은 이들의 숨결, 한숨과 감탄, 격정에 겨운 표정까지 전해온다. 책에 배어 있는 흔적을 만지고 체취를 맡을 수 있다. 누군가의 눈물을 자아냈을 문구를 만나면 가슴부터 먹먹하다. 누군가가 밑줄을 그어 마음 깊은 곳을 드러낸 단어와 문장들에서 함께 감각을 나누는 기쁨도 있다. 귀퉁이 접어놓은 페이지 어디쯤을 다시 보려고 했을까? 행간을 들여다보며 이해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을 쓸 때만큼의 시간을 들이라는 말을 실천해 보려고 글자들의 사전적 의미 너머의 의미를 새겨 본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쓰려는 마음에 갈음하기도 한다. 쓰고 싶은 단어와 문구를 발견하면 미리 다녀간 마음자리를 살펴볼 수도 있다.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을 들춰볼 수도 있다. 사랑도 책으로 배웠다는 말이 생각난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게리 쿠퍼에게 묻는다. “코는 어느 방향으로 두나요?”

   가족과 처음으로 외국 여행 갈 때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행선지인 방콕 여행안내 책자였다. 책과 여행의 공통점은 낡은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 책은 전인미답의 세계여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내게 그 책의 내용은 무수한 사람들의 족적과 경험의 탑이었다. 새 책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여행으로 들뜬 마음이 상했다.

   태국 안내 책자에서 방콕 부분을 분철해서 낡은 책을 만들었다. 뜯겨 나온 부분은 날개 젖은 새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낡은 내용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 떠올랐다. 나머지 부분으로 끈 떨어진 책을 단단히 매며 책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방콕 도착 후 호텔방에서 아뿔싸!’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떠나 왔다는 걸 알았다. 어미 잃은 새끼 양이 된 느낌이었다.

   책을 기증하려고 경기도 변두리 도서관에 300권이 넘는 책을 가져갔다. 담당자가 아니라는 직원은 군 소재 중앙 도서관으로 보내야 한다며 구석에 두고 가라고 했다. 7년 차이가 나는 아이 둘의 책은 급변하는 세태에 맞춰 정보는 물론 철자법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나서 기증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중앙 부처에서 심사하되 발행한 지 3~5년 사이의 책만 받는다고도 했다. 고개가 갸웃해지는 씁쓸한 순간이었다. 중학교의 권장 도서는 7년이 한결 같았건만.

   중고 서점에는 초기 판매 가격의 1/4값으로 살 수 있는 책이 많다. 44권의 책이 배달 온 날 일기에 ‘44가지의 행복이라고 썼다.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은 물처럼 순하고 부드럽게 흐른다. 책은 상처 줄 줄 모르고 언제나 너른 품으로 고르게 껴안는다.’ 도서관의 홍보 글귀에서 나의 품에 날아든 구절이다. 내 가족이 된 책에게 갖가지 펜으로 족적과 필적을 남기며 44일 동안 얼마나 행복했던지.

   파주 출판 단지에 간 적이 있다. 빌딩 숲 도심에 익은 눈에 그다지 높지 않은 2-3층 가량의 건물들이 책을 닮았다. 짙은 쥐색에 어울리는 견고함이 책의 특징과 위엄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새 책은 오래도록 낡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다. 새 책은 사그락손을 벨 듯 소리도 낸다. 처녀지에서처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다가들어 본다. 뻣뻣해서 책장을 넘기기도 어렵다. 오히려 독서에 방해가 된다.

   도서관의 낡은 책을 읽다가 내 것이 되는 책도 있다. 인상 깊었던 부분, 소장해야 할 문장들을 옮겨 적다 일독을 권하는 책 속의 책을 사기도 한다. 읽은 책을 사는 것이다. 이해가 채 되지 않는 것은 씨름하려고 들인다. 나이 들어 도서관에 가지 못할 때를 대비한 책도 있다. 움직이지 못할 때라도 시력과 이해력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턱없는 욕심은 내려놓을 수 없다. 그렇게 구입한 책은 도서관의 서가를 훑다가 온도가 통해 집어 오는 책과는 느낌이 다르다.

   내 서가는 작은 집 북쪽에 면한 방의 두 면이다. 붙박이장과 터무니없이 큰 창이 있어 책꽂이를 놓을 자리가 부족하다. 낮에는 비어있는 안방을 호시탐탐 노린다. 잘 때는 아늑하고 어둑신한 데가 더 좋단 말이야~.’ 남편에게 방을 바꾸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일터인 바다로 출항하는 아들의 뒤로 아들이 주문해 주는 책이 배달되어 온다. “얼른 장가 갈 테니 내 방에 엄마 책을 다 갖다 놓으라.”는 말이 효성에서 나오는 말인지, 장가보내 달라는 말인지 해석 불가인 채로 다시 거울도 없이 책뿐인 방 둘의 주인이 된다.

   어떤 저자는 직접 지은 책에 냄비 받침으로라도 써 주십시오라고 써서 건네기도 한단다. 책 쓴 이의 겸손대로 냄비 받침으로 쓰였다면 독서인 곁일 게 분명하다. 독서하다가 때를 놓쳐 고픈 배를 달래려 뒤늦게 우르르 라면을 끓여 받침을 찾는다. 읽다 내려놓은 책은 크기며 재질, 높이 등이 받침으로 안성맞춤이다. 책은 기대를 저버리는 적이 없다. 마음의 양식이 몸의 양식을 보충한다. 낡은 책은 그러면서 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규장각 검서관인 책벌레 간서치(看書痴) 이덕무는 **구서(九書)를 말했다. 독간초교평저장차폭(讀看抄校評著藏借)’ 모두가 잠 든 밤 책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는 무섭지 않다.

 

*위편삼절(韋編三絶): 공자가 책을 즐겨 읽어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음에서 유래함.

**이덕무 구서(九書): 소리 내어 읽는 독서(讀書)를 비롯, 간서(看書), 초서(抄書), 교서(校書), 평서(評書), 저서(著書), 장서(藏書), 차서(借書), 폭서(曝書)를 일컬음.

봉혜선
서울 출생
<한국산문>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ajbongs60318@hanmail.net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내 책을 읽을 기회다. 집콕, 방콕, 책콕. 이 아니 행복한가.
                                                                                                    (한국산문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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