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피아
윤기정
아내와 나선 산책길이다. 우리를 앞질러 커플룩의 남녀가 페달을 밟으며 지나친다. 흔히 보는 일반 자전거인데 남자의 자전거 뒤에 작은 수레 하나 매달려 따라가는 것만 다르다. 유아용 수레로 보였다. 주말을 맞은 젊은 내외가 아기와 함께 나왔나 보다. 수레는 사방을 불투명한 비닐로 둘렀다. 아이 낳기 꺼리는 세상에 뒷자리의 아이를, 아이의 미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밝아진다. 우리를 지나친 두 대의 자전거와 매달려 가는 유아용 수레가 ‘명품 산책길’ 저만큼 멀어져간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일은 선택할 수 없는 행운이다.
‘명품 산책길’은 양평 남한강가에 있다. 길 양쪽으로 벚나무가 즐비하다. 벚꽃 피는 4월이면 서울에서까지 봄을 즐기려는 사람이 몰린다. 여름이면 벚나무가 햇빛을 가리고, 가을이면 바람에 쓸리는 낙엽이 발밑에서 부서지고, 겨울이면 잎 떨군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짝이는 눈길에 어룽거린다.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가로등 환한 밤까지 많은 이들이 찾는 길이다. 길 이름은 군(郡)에서 붙였을 텐데 스스로 ‘명품’이라는 말을 쓴 게 우습기는 하지만 제법 어울린다.
계절 따라 바뀌는 풍광도 좋지만, 시설도 좋고 특히 이용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좋다. 무엇보다도 유원지처럼 모여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술 취해서 쓰러져 자거나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다른 사람 곁을 지날 때는 목줄을 바투 쥔다. 배변 처리용 비닐도 가지고 다닌다. 간혹 음악을 크게 틀고 걷거나 자전거 타는 사람 빼고는 대체로 명품 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강 가까이 자전거 길을 따로 낸 구간도 있지만 길은 대부분 자전거도로를 겸한다. 주말이나 봄 · 가을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자전거가 많아진다. 자전거 사슬이 햇빛을 받아 빠르게 돌면 바퀴는 은반처럼 반짝인다. 미끈한 두 다리로 페달을 밟아 두 개의 은반을 굴리며 자전거를 몰아가는 이들에게서 푸릇한 젊음이 느껴진다. 양평으로 이사 오면서 자전거를 타려다가 적지 않은 나이에 부상이 염려되어 그만 두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 무리가 지나가면 넋을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부럽고 아쉬운 마음으로 눈길이 간다. 이제는 그 마음도 거의 가셨지만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맞춰 입고 무리지어 달리는 젊은이들을 보면 유니폼이 주는 으쓱함과 소속감이 그리워진다.
돌아가는 거리까지 따져서 5Km 정도, 그러니까 그 반 정도인 지점이 우리의 반환점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보았던 유아용 수레를 매단 부부의 자전거가 이번에도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꽤 멀리까지 갔다 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도 몇 대의 자전거가 더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구부러진 작은 언덕을 오르니 산책길과 옆 마을로 이어지는 소로가 만나는 삼거리 큰 벚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운 대여섯 명의 젊은이가 보였다. 더러는 앉고 더러는 둘러선 것으로 보아 일행으로 보였다. 그 중에 유아용 수레가 보였다. 그 부부도 일행이었나 보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문득 아기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맑은 공기를 쐬게 하려면 아기가 밖으로 안아내겠거니 하는 기대를 가졌다. 서너 걸음쯤의 거리로 가까워졌을 때 한 여인이 유아용 수레로 다가섰다. 아기의 엄마일 거라고 짐작했다. 수레 앞면 즉 비닐 창이 있는 면을 들어올렸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을지도 모른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삽살개처럼 앞이 보일까싶게 털로 눈이 뒤덮인 개가 보였다. 그것도 두 마리씩이나. 녀석들은 제가 달린 것도 아닌데 힘든 듯이 혀를 길게 빼고 있었다. 미간에 흘러내린 머리털을 묶어서 똑같이 빨간색 나비 리본을 하나씩 달았다. 여자가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안더니 “아빠한테 물 달래자.” 하면서 한 사내에게 건넨다. 낯설지 않은 가족 구성이다. 유모차에 개 한두 마리 태워 밀고 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거리 풍경이 된지는 오래다. 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개 가족, 사람 가족? 가족이면 당연히 사람의 가족이지 따로 이름 붙여 불러야 하나? 노인들의 경우 그 심정이 이해되는 면도 있다. 이제는 가족을 만들 수도 없고, 지난 시절의 가족은 지금은 내 가족이 아니다.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에 충직하고 친화력 좋은 가족이 필요할 터이다.
개의 식용 문제는 갈등이 남았기는 하지만 의식이 많이 달라졌다. 서울올림픽 때 개 식용을 문제 삼아 올림픽을 보이콧하자는 목소리가 컸던 때와는 달리 동물 권익을 따지는 세상이다. 개를 먹지도 않고, 식용도 반대한다. 그렇다고 사람처럼 대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이 개들의 엄마, 아빠가 될 수 있는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나라는 인구 절벽을 맞는다는 예상이다. 북한 핵, 주변의 강대국, 질병의 대유행보다도 무서운 게 인구 절벽이란다. 쉽게 말하면 사람의 씨가 마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개로 대신하겠는가? 개 부모를 자처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개 받드는 정성이면 아이 못 키울 일도 없어 보인다. 개 사료, 개 장난감, 개 카페, 개 미용, 개 호텔…. 바야흐로 ‘개토피아’(개+유토피아), 개들의 천국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노인 중에도 개 부모라고 자칭하는 경우가 있으니 제 자식과의 족보는 어찌 정리하였는지, 개가 늙은 부모를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둥 개를 천시하는 말은 의미를 잃은 시대다. ‘개 같은 놈’은 ‘개 같은 분’으로 바꿔야 할 판이다. 모든 국민이 개와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해달라고 촛불로 광장을 메워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한 생명으로서 개의 목숨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사람과 개의 구별 지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아직은 ‘개 같은 놈’ 소리는 사양입니다. ‘개만도 못한 놈’이 좀 나으려나?
<양평문학 23> 202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