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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꿈은 조선생(2020.05한국산문 신작수필)    
글쓴이 : 김숙    20-12-24 02:50    조회 : 5,315

내 꿈은 조 선생

 

김숙

 

   누군가가 물었더란다.

   "커서 뭐 될래?"

   "저요? 조 선생 될래요."

   "아야, 김씨가 어찌 조 선생이 된다냐? 너는 김씨니까 김 선생이 되어야지.”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을까? 덕분에 좌중들은 박장대소하였다 했다. 몇 해 전 가을날 고향에 갔을 때 팔순을 바라보는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다.

   "니가 어렸을 때 동네 사람들한테 조 선생 된다고 했어."

   전혀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면 이 쑥스러운 이야기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이었을 것이라고 우겨본다.

 

   조 선생님은 고향 마을에 살았던 인물이었다. 보통 키의 동실동실한 몸집에 머리는 짧게 펌을 했었고 얼굴은 둥글 넓적하였다. 중년을 훌쩍 넘긴 목소리는 칡뿌리를 두들겨 여러 결로 갈라놓은 듯 컬컬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한옥으로 지어진 원불교 교당이 있었다. 잘 가꿔진 아담한 정원과 본당 외에 여러 채의 부속 건물도 있었다. 조 선생님의 집은 원불교 마당을 거쳐서 들어가면 또 대문이 나타나는 별당 같았다. 비밀의 정원 같은 특별함이 있었다. 그미는 그곳에서 장성한 두 딸과 살았다.

   남편은 6.25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들었다. 그 보상으로 교육대학 출신도 아닌데 교사가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합당한 자격을 거쳤을 것으로 유추된다. 가르칠 실력이 없다는 둥 수완이 좋아서 1학년 담임만 맡는다는 뒷담화도 따라다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조 선생님이 나의 담임을 한 적은 없다. 그저 학년 초 애향단을 조직할 때나 마을 꽃길을 조성한다고 코스모스 모종을 옮겨 심을 때 마을 담당 교사로 한두 번 정도 만날 수 있던 정도였다. 자상하거나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다가가고 싶은 표상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함에도 내 꿈에 강림했다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그미에게서 어떤 커리어를 느꼈었을까? 아니면 산골 동네에 모델을 삼을만한 인물이 드물었던 탓이었을까?

 

   ‘교사가 되어도 좋겠다.’라고 어렴풋이 생각한 적은 있었다. 탈무드에서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를 만났을 때였다. 중학생이었던 것 같다.

   로마는 기원후 70년부터 유대민족을 말살시키려고 했다. 유대민족은 최대의 정신적 위기에 처했다. 이때 가장 크게 활약했던 벤 자카이라는 랍비가 있었다. 그는 유대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골똘히 연구했다. 그리고 로마의 유력한 장군을 찾아갔다. 그 장군에게 당신은 황제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장군은 황제를 모독했다.”라고 버럭 화를 내다가 벤 자카이에게 자기를 찾아온 목적을 말하라고 했다. 벤 자카이는 딱 한 가지 소원이 있다.”라며 그것은 한 칸의 교실이라도 좋으니 조그만 학교 하나만 지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만은 없애지 말아 달라.”고 했다.

   벤 자카이의 예언대로 장군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작은 학교 하나만은 절대로 없애지 말라.”며 대수롭지 않게 명을 내렸다.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만 있으면 유대민족의 전통은 이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바란 대로 그 학교에 있던 랍비들이 유대 민족의 지식과 전통, 신앙 등 유대의 얼을 지켰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유대인들의 생활 규범까지도 앞장서서 선도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학교가 오늘날 유대민족을 전 세계에 우뚝 서게 만든 중요한 근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랍비처럼 좋은 교사도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수박껍질 맛으로나마 느꼈던 적이 있었다.

 

   말이 씨가 되었던지, 무의식중의 자성예언이었던지 나는 정말 교사가 되었다. 동네 어른들의 말대로 조 선생이 아니고 김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실감 나지 않았다. 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날 불렀을까? 대답할 자신감이 없기도 했고 대답 대신 돌아보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라면 요즘 말로 최애의 존재였다. 나에게도 그런 은사님이 대부분이었고 높고 귀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여도 되나 스스로 반문하기도 했다.

   1983년 봄, 첫 소풍 가는 날이었다. 나는 강진 J 중학교 1학년 1반 담임이었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학급의 가장 앞에서 걷는 인솔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군사 정권 시대였던지라 소풍의 명칭도 행군으로 바꿔 부르던 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학생들은 교실을 떠나는 홀가분함에 날아가고 있었다. 날개 없이도 붕붕 뜨는 재주를 가진 귀재들이었다. 뒤에서는 학생부 선생님이 오와 열을 맞추라.”라고 고함을 쳐댔다. 천천히 가라고 호루라기를 , 불어대기도 했다.

   신출내기 교사는 땀을 삐질 거리며 앞뒤로 뛰어다녔다. 호루라기 소리에 장단도 맞춰야 할 것 같고, 하늘 끝까지라도 솟구칠 것 같은 행렬의 기분도 조절해야 할 것 같았다. 속된 말로 바짓가랑이가 찢어지고 운동화 한 짝이 벗겨진다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걸음이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뒤에서 아무리 호통을 치고 호루라기 신호로 겁을 주어도 울타리 없는 운동장에 풀어진 자유로운 영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걷는 것 같은데 앞서서 갔다는 이유로 뒤따라오던 학급과는 한참 차이 나게 돌진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소풍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깨졌다. 설레고 즐겁기만 했던 소풍에 리얼 삶의 현장을 더했다. 그것이 교사의 소풍이었다. 내가 선생일까? 라고 주저 거릴 틈이 없었다.

 

   3월 말이나 4월 초의 월중행사에는 가정방문이 있었다. 사나흘 정도 가가호호마다 방문하여 학생의 학교 밖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길라잡이 학생 한두 명과 마을별로 찾아갔다. 부모님과 상담하고 공부방 여부 정도를 살폈다. 부모님이 일터에 나가고 없는 경우는 집에 남아 있던 조부모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아껴두었던 달걀 한두 개를 쪄서 인정으로 내놓기도 했고, 보리 잎을 넣은 백설기 한 조각을 챙겨 주기도 하였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던 까치내(鵲川) 들판은 봄빛이 완연하였다. 푸른 보리밭이 내륙 깊숙이 파고든 강진만 바다로 물결치는 것 같았다. 그 위로 번지는 발그레한 석양빛을 마주하며 방천길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뒤에서 부르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성인이 아버지였다. 어깨에 걸쳤던 괭이를 땅바닥에 황급히 내려놓고는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부여잡았다. 투박하고 거친 촉감이 뼛속까지 스몄다.

   “저 성인이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인이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하였다. 자식의 선생이 왔다는데 행여 못 만날까 봐 들길에서 황망히 달려왔던 아버지! 뉘라서 중년의 어른이 손을 내밀고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한단 말인가? 나는 뒷머리를 쿵 맞은 것 같았다.

 

   성인이 아버지를 만난 후로 교사에 대한 나의 환상이나 껍데기는 벗었다. 자신감이 있든 없든, 유능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문제였다. 아무나 벤 자카이처럼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거나 민족의 얼을 지켜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 선생이든 김 선생이든, 밥줄에 전전긍긍하든 존경의 대상이든 학생이 바라보는 선생, 학부모가 기대하는 교사는 어쩌면 또 하나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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