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돈
이성화
남의 돈 떼어먹고 잠이 오고 밥이 넘어갈까. 거지 똥구녕에 콩나물도 모자라 이빨에 고춧가루도 빼먹을 놈. 불면증 걸려 벌건 눈 튀어나와 뒈질 놈. 물 한 모금 못 넘기게 해 바싹 말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 더한 저주와 욕을 퍼붓고 싶지만 내가 아는 욕이라곤 외할머니가 입에 달고 사셨던 ‘문디지랄’과 TV에서 얌전한 얼굴의 아이돌이 전라도 사투리로 뱉어낸 ‘씹색연필’ 정도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해도 직원들 월급, 외주 인건비, 부업 아줌마들 일당까지 다 주고 나면 우리 부부 한 달 생활비나 간신히 남을까 말까 싶은 돈인데, 그걸 떼먹고 중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사기꾼은 중국에서 물주를 만나 사업자금 마련한다면서 우리에게 희망고문만 하면서 썩은 동아줄을 잡고 버티게 만들더니 급기야 줄을 끊고 사라졌다.
결국 친구들, 친척들, 빌려준다는 모든 이에게 손을 벌려 직원 월급과 외주 인건비를 해결하고 아홉 살, 일곱 살, 세 살의 아이들에게 절약을 강요했다.
우리에게 일감을 대주는 프로모션 회사, 즉 ‘갑’은 대체로 두 부류다. 한 부류는 제날짜에 척척 물품 대금을 입금해줬다. 한데 단가가 짜다. 큰돈이 들어와도 인건비 주고 공장세와 전기세라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부가세 낼 돈으로 쌀을 사고 라면도 샀다. 그리고 체납자가 되었다. 다른 부류는 단가를 후하게 쳐준다. 이들은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독촉하면 일부만 주고 기다리면 안 주기 일쑤였다. 우리는 찔끔찔끔 받은 돈으로 인건비를 주다가 모자라면 빌려서 주고, 받으면 갚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손해가 났는지 이익이 있었는지 모르게 통장은 비고 신용을 잃었다. 우리는 그렇게 흔들리는 줄을 이리저리 옮겨 탔다.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사촌 형 니트공장에서 일을 배웠고, 결혼 전에 한번 사업을 했다가 망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중하게 시작했고 피 터지게 일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IMF 때보다 소비가 더 위축된다는 신문, 방송 기사를 보지 않아도 뼛속까지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 공장을 했던 사람들은 옷 한 벌에 4~500원 할 때 80만 원 정도 벌 수 있었단다. 옷값은 4~5,000원짜리부터 4~50만 원, 몇백짜리 명품까지 열 배에서 백 배, 천 배까지도 올랐지만, 2010년 공장을 시작한 우리가 벌 수 있는 돈은 아무런 사고가 없는 것을 기준으로 많아야 세 배 정도 올라갔다. 그러니 사기를 피해간다 한들 제조업에 무슨 희망이 있고 전망이 있겠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활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을 즈음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참 많다는 걸 알았다. 신용보증기금에서 빌렸던 돈을 일부라도 미뤄 달라 사정하러 갔더니 직원들이 줄지어 앉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독촉 전화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사정은 알지만 오늘은 꼭 입금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도 조금 더 힘써 보십시오.” “은행 마감 시간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세무서 체납징세과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은행에 가도 비슷했지만, ‘제1 금융’과의 거래가 끊겨 점차 갈 일이 없어졌다.
중소기업 실태조사니 뭐니 설문 전화가 왔다. 하소연해 봐야 입만 아팠다. 상담하는 나이 지긋한 목소리의 아저씨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목소리로 “그렇죠. 요즘 다 그렇더라고요.” 했다.
개인파산이나 회생절차를 상담해 보아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빚 독촉에 시달리지 않게 법적으로 보호해 준다는 것뿐, 부가세 1원도 감면이란 것은 없었다. 제조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정책이 물론 있기는 하다. 열심히 알아봤지만 실정에 맞지 않았다. 정책대로 맞춰 적용하려고 이리저리 뛰는 시간에 쪽가위질이나 한 번 더 하는 게 나았다.
우리 상황이 어찌 됐든 빌린 돈을 갚아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남편은 또다시 새벽부터 아이롱을 하고 옷 보따리를 싸 들고 부업 집, 단추 집, 사시 집으로 져 날랐다. 줄어든 직원들의 몫까지 나는 손가락에 쥐 나도록 쪽가위질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스쿠이 기계 돌리는 법도 배웠다. 그런데도 떼먹힌 것은 쌓이고 빌린 것은 불어나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올라가 보려고 아등바등하다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발목에 매달린 빚이 어림도 없다는 듯 잡아 끌어내렸다.
남의 돈 떼어 먹고 잠이 오고 밥이 넘어갈까 싶었는데, 빌린 돈을 갚지 못한 채로 나는 밥 먹고 잠을 잤다. 제날짜에 갚지 못해 미루고 미루다 미안해서 거짓말도 하고 연락도 피했다. 돈 못 받아 피 마르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러면 안 되지 싶다가, 하루 이틀 독촉 전화가 안 오는 날이면 마음이 느슨해졌다. 아니,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 목이 숨쉬길 포기할까 싶어서. 그러다 친구의 문자 한 통, 카드사 전화 한 통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넘겨 허옇게 죽어갔다. 그러곤 다음 날 아침이면 막내아들의 애교에 깔깔 웃었다. 먹어야 일도 하고 돈도 갚는다며 끓인 라면이 어찌나 맛있는지 찬밥을 찾아 부엌을 뒤졌다.
출근하면 아이들이 “엄마 오면 잘 거야.” 하고 떼쓰며 전화할 때까지 정신없이 일했다. 퇴근하면 아이들과 웃고 TV를 보며 쉬기도 했다. 그렇게 무뎌지다 보니 ‘이렇게 남의 돈 떼먹고 잠자고 밥 먹는 인간이 되는구나. 타고난 나쁜 사기꾼도 있겠지만 나도 이러다 사기꾼 되는 거 순식간이겠구나.’ 싶었다. 정신 차리려고 눈을 부릅떴다.
‘큰딸의 반듯한 표정, 또르르 굴러가는 작은딸의 웃음, 막내아들의 말간 눈을 보며 힘 내보자. 사는 게 원래 고단한 거라는 엄마의 거친 손발, 뼈마디뿐 아니라 마음자리 추억들도 모두 내어준 아버지의 텅 빈 눈을 보며 일어서자. 혼자 외롭고 고단할 텐데도 너희들만 잘 살면 된다는 시어머니 전화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 차리자. 정신줄 꽉 붙들고 살아보자.’
밤마다 되뇌다 옆에 누운 남편의 뿌연 눈빛이 TV 속인지 허공인지 공허하게 헤매며 꾸르륵거리면 다시 부엌에 나가서 라면 쪼가리를 찾아 부스럭댔다.
그렇게 버티다가 떨어질 지도 모른다. 떨어질 세상이 폭신하고 따뜻한 풀밭이길 바라지만 삐죽삐죽 장대밭일지도 모르니 아예 아래를 보지 않는다. 이번에는 튼튼한 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길 바라며 죽을힘을 다해 매달린다. 거세게 발목을 잡아당겨도 그것까지 안아 들고 올라갈 수 있게 용을 쓴다. 남의 돈 떼먹는 자, 편히 잠들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 내린 저주를 라면에 찬밥 말아 꾹꾹 넘기면서.
2021년 <현대수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