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의 역습
홍정현
카페에서 모야 씨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의 양말부터 바라보았다. 그가 발표한 수필 〈양말은 나의 힘〉을 읽고, 모야 씨를 만나면 발부터 확인해봐야지, 라고 생각했던 터라…. 예상대로 양말은 화려했다. 머스터드 옐로와 마린 블루의 보색 조합에 알록달록한 부엉이 그림까지. 특이한 것은 그런 화려한 양말에 더 화려한 샌들을 신었다는 거다. 붉은색 샌들에는 진주 장식이 달려있었다. 멀리서도 발만 동동 떠 보일 것 같은,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양말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양말은 나의 힘〉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왜 양말이냐고? 나도 모르겠다. 세상의 덕후들에게 물어보라. 무엇 때문에 그것에 빠져들었는지. 그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덕후에게 ‘덕통사고’는 말 그대로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과 조우하는 순간, 이유 없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는 것. 나도 그랬다. 먼 외계별에서 홀로 지구에 떨어진 것 같은 외로움이 지배하던 시절, 나는 알록달록한 양말이 그냥 좋아졌다, 빠져들었다. 양말은, 일상의 다양한 형태의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는 나만의 배출구였다.
모야 씨에게 이름이 참 특이하다고 말했더니, ‘양말이 이게 뭐야. 수필이 이게 뭐야.’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모야’라는 필명을 지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명은 밝힐 수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본명을 묻지 말라는 뜻이리라.
내가 일하고 있는 수필지에서 ‘별난 수필, 별난 작가’ 특집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했더니, 지인이 모야 씨를 추천했다. 모야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옷차림이 너무 튄다, 속을 알 수 없다, 고집이 세서 모 편집장과 싸우고 그 잡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등 대부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의 수필은 형식과 내용이 독특했다. 그래서 기존의 수필과 차별되는 새로운 바람이라고 주목받기도 했지만, 문학적 사유가 깊지 않고, 보편적 공감을 이끄는 힘이 부족하다는 평도 받고 있었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모야 씨는 내가 생각한 인터뷰 방향을 바로 파악한 듯싶었다. 그는 내 질문에 족집게처럼 원하는 답을 콕 집어 말했다. 심지어 내가 질문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을 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유도해갔다.
양말에 집착하는 이유에 관한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시는 분이 가끔 ‘머리에 힘을 빼주세요’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면 순간적으로 머리에서 힘을 어떻게 빼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지 않나요? 저만 그런가요? (작게 웃음) 힘을 빼려고 머리에 신경을 집중할수록 힘이 더 들어가서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 해결 방법이 떠올랐어요. ‘머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발가락에 힘을 꽉 주면, 머리 쪽에 힘이 덜 들어가지 않을까’라고요. 괜찮은 방법이었어요. 제가 양말을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머리에서 힘을 빼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꽉 주는 것.”
어딘가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빼기 위해 화려한 양말을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힘 빼기와 화려한 양말이라…, 멋진 조합이었다.
그는 대화에서 강약을 조절할 줄 알았다. 어떤 순간 허술하게 보인다 싶다가도, 바로 냉정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거기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 이래서 모야 씨를 보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구나, 싶었다.
속전속결로 인터뷰는 끝났다. 모야 씨의 오늘 목적이 인터뷰 빨리 끝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와 헤어지기 전, 진짜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저, 혹시 홍OO 씨를 아세요? 저희 잡지 편집위원이었는데, 많이 닮으셨어요. 성격과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잘 몰라요. 제가 좀 흔한 얼굴이지요?” 그의 미소는 확고한 차단의 수단처럼 보였다. 무표정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모야 씨가 내 양말을 바라보았다. “아, 삭스해피니스의 2019년 리미티드에디션이네요?” 인터뷰를 위해 나는 친구가 선물한 화려한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 양말은 모야 씨가 신고 있는 양말과 같은 브랜드였다. 짙은 초록색 바탕에 핑크 물방울무늬가 있는 한정판 양말. 내 양말을 본 모야 씨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져있었다. 단호하게 그었던 선의 일부가 살짝 지워진 정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10센티미터쯤 벌어진 느낌?
전철역까지 걸어가며 우리는 양말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양말 브랜드, 양말 전문점, 양말 동호회, 구달 작가의 에세이집 《아무튼, 양말》 등. 주로 모야 씨가 이야기하고 나는 적절하게 ‘리액션’을 하며 듣기만 했다. 전철역에 가까워졌을 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 나는 또다시 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런데, 모야 씨, 저희 잡지에서 일했던 홍 부장과 너무 닮았어요. 말투나 표정 등은 전혀 다른데 외모가 비슷해요.”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역 근처 호프집 간판을 바라보던 모야 씨가 엉뚱한 말을 했다. “혹시 부캐(副character)라는 단어 들어봤어요? 요즘 텔레비전에서 많이 나오잖아요. 나의 본래 모습인 본캐(本character)가 아닌 나의 또 다른 캐릭터인 부캐요. 부캐라는 게 일종의 연기라고 볼 수 있잖아요. 나의 평소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 평소 꿈꾸었던 다른 내가 되어보는 것. 그런데 계속 그렇게 연기를 하다 보면, 부캐와 본캐가 역전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재미있지 않을까요? 부캐의 역습이라고 해야 하나?”
부캐의 역습? 갑자기 부캐 이야기는 뭐지? 제목이 없는 두꺼운 책의 하드커버 표지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쓰여있을 것 같은데,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답답함.
“다 왔네요. 5호선을 타신다고 했죠? 여기로 내려가시면 되어요. 제가 탈 3호선은 저쪽이네요. 특집에 제 이야기를 써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모야 씨의 인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의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인사 대신 이렇게 묻고 싶었다.
“아, 모야 씨. 도대체 그 미소는 뭐예요? 뭐야? 모야 씨….”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