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마루백화점의 여인
‘순간 깜짝 놀랐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외모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가는 다른 데 있었다.’
점심을 먹고 산책에 나선다. 어느 쪽으로 향할까, 잠시 망설인다. 온종일 진료실에 앉아 환자를 대하는 나로서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오늘은 3월 2일, 일본영사관 쪽으로 길을 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 첨사로 가장 먼저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했던 충장공(忠壯公) 정발 장군의 동상에서 일본영사관까지는 ‘항일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살갗을 스치는 봄바람이 제법 매섭다. 모자를 눌러쓰고 목도리를 고쳐 맨다.
평화의 소녀상 앞에 멈춰 선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청동 조각상이다. 누구의 배려일까. 오늘은 소녀가 머리에 하얀 털모자를 쓰고, 목에는 하얀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소녀의 가슴속 깊이 사무친 냉기가 다소나마 훈훈해질 것 같다. 수심이 가득한 소녀의 가느다란 눈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갈 수 없는 나라인가. 한복 차림에 맨발인 소녀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앉아있다. 가녀린 소녀가 감내할 수 없는 고초를 이겨내고 도착한 고국 땅, 그곳은 더는 발바닥을 온전하게 디딜 안식처가 아니었다. 소녀는 평생을 죄 아닌 죄의식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소녀는 할머니가 되고, 이를 반영하여 소녀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소녀상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다. 소녀의 공허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의 자리일까, 미처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고 떠나간 다른 소녀가 앉았던 자리일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보듬어줄 누군가를 위해 비워놓은 자리일까, 소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일본은 나의 첫 해외 방문지이다. 전공의 3년차 때인 1996년 8월, 한일 비뇨기과학회가 열린 오사카를 방문했다. 막내 교수가 인솔하여 세 명의 전공의가 참석했다. 노태우 정부 들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지만, 전공의 수련 중인 우리 대부분은 해외 나들이가 처음이었다.
어느 도시에 가든 그곳만의 특색이 있다. 하지만 오사카 거리는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들, 거리의 분위기나 주위의 건물들…, 모두 서울과 비슷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일본인들과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아주 쉬운 영어로 물어봐도 알아듣지 못했다. 저녁때 주점에 들어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일행이 ‘간빠이(乾杯)’를 외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어로 간단한 질문을 해보니 우리에게 싱가포르에서 왔냐고 반문했다. 속으로 웃었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직원들이 큰소리로 인사하며 맞아주었다. 이들의 목소리, 표정, 행동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에게서 선진국 국민이 무의식중에 가지는 우월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시급을 받고 일하는 일용직일지라도 투철한 직업의식이 있었다. 이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이 같은 곳은 보지 못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우리가 일본을 말할 때 흔히 쓰는 문구다. 지난 시대의 앙금이 그대로 담겨 있는 역설적 표현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유별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한일 간에 벌어지는 스포츠 경기를 관전할 때면 왜놈한테는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응원 소리를 듣곤 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나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선입견을 뒤집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오사카 중심가인 우메다(梅田)에 갔다. 우메다에는 한신(阪神)백화점, 한큐(阪急)백화점, 다이마루(大丸)백화점 등이 모여 있다. 서울 소공동의 백화점 거리와 비슷했다. 오사카가 초행인 우리는 도움을 얻고자 다이마루백화점에 들어갔다. 영어가 통할 것 같았다. 데스크에는 제복 차림의 여직원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 키가 가장 큰 미인에게 다가갔다. 남자들이란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어느 항공사의 여승무원을 연상시키는 모자와 스카프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일본인 특유의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는 길을 영어로 물어보았다. 순간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 뭐랄까. 그 앞에서는 도저히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해맑은 순수함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해했다. 우리는 그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였다. 그녀가 따라오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손짓을 했다.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 지하도로 내려가서 십 분 정도 걸어갔다. 그녀는 어느 출구 앞에 멈추더니 이리로 올라가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그 순간 단정하게 땋아 올린 머리카락 위에 있던 조그만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긴 목을 앙증맞게 감싸는 스카프가 보였다. 왠지 그 둘은 그녀의 상징물 같았다. 돌아가는 그녀의 늘씬한 뒤태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이었다.
나는 가끔 지인에게 그 여인과의 일화를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반응은 한결같다.
“설마?”
그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일본이 괜히 잘 사는 게 아니야. 이런 호의를 받은 외국인들은 얼마나 그 나라를 좋게 평가할까? 우리가 국가 간의 갈등으로 일본이라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지만, 개개인의 면모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아. 친절은 조건 없이 베푸는 거야. 사소하지만 이게 바로 애국이야.”
세찬 바람이 소녀상에 몰아친다. 소녀 옆의 빈 자리가 더욱 허전해 보인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여인을 소환한다. 여인은 소녀를 보더니 가만히 머리를 조아린다. 무언가를 사죄하고 있는 듯하다. 두 여인이 서로의 모자와 목도리를 매만지며 교감하고 있다.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국산문≫ 202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