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사랑길에서
윤기정
덕평천을 따라서 걷는다. 덕평교 밑을 지나면 왼쪽으로 덕평천을 건너는 무지개 모양의 작은 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를 건너면 성당으로 가는 길이다. 다리를 건너 검은 기와를 인 흰색 당장을 끼고 걸으면 성당 정문이 나타난다. 정문에서 보면 가로획이 세로획보다 긴 ‘¬'자 모양의 본당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획이 꺾이는 부분에 첨탑을 세웠다. 엄지손가락 마냥 뭉툭하고 키 작은 탑이라 첨탑이라기엔 너무나 겸손해 보인다. 연한 황토색의 벽돌로 바닥을 치장한 마당은 본당을 감싸 받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오던 때에 순교자들이 치명한 곳에 지은 순교자 기념 양근 성당이다. 남쪽 울타리 쪽에 세워진 양면십자가의 두 예수는 순교자의 뜨거운 피 스몄을 순교 마당과 붉은 피 강으로 흘러들던 덕평천을 각각 내려다보고 있어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 산책은 성당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시작했다.
하늘사랑길 양 끝과 이어지는 자전거 길은 남한강 구간 자전거도로이다. 봄․가을과 주말이면 달리는 자전거로 넘쳐나는 길이다. 이 길에선 경의중앙선 위, 남산 중턱의 전원주택과 아래쪽의 원주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길과 6번국도 사이로는 길가의 상점이나 음식점, 가정집들의 쌓아놓은 잡동사니가 노숙인처럼 뒹굴고 있는 뒷마당이 내려다보인다. 목줄에 묶인 채 자전거가 지날 때마다 짖어대는 비닐하우스 옆 누렁이는 맴을 돌며 제 삶의 범위를 확인하곤 제 풀에 짖기를 멈추곤 한다. 6번 국도를 시속 80㎞로 달리는 차량의 소음이 여과 없이 자전거 길까지 올라온다.
성당, 하늘사랑길, 자전거길. 3년 넘은 산책 코스다. 양평으로 이사 오면서 아내와 자전거를 탈까 궁리하다가 그만 두었다. 집 앞 골목길만 벗어나면 바로 자전거길이어서 좋은 여건이긴 했다. 그러나 주변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한 이야기를 듣고 주저하다가 자전거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그만 두었다. 마침 고물상 허사장이 알려준 하늘사랑길이 호젓한데다 하늘빛이며 물빛이 고왔다. 태양 아래 반짝이는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는 윤슬과 거꾸로 물에 잠겨 잔잔히 일렁이는 강변 풍경이 마음을 다독였다. ‘하늘사랑길’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과 고즈넉함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망설임 없이 걷는 쪽을 택했다. 재작년 한 달 여의 미국 여행 때를 제외하곤 거의 거르지 않고 걸었다. 아내의 무릎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함께 걸었다. 아내가 물보다 산을 좋아해서 산기슭으로 난 자전거도로로 덕구실 육교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지난 해 아내는 무릎에 물이 차는 증세로 치료를 받았다. 걷는 게 무리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걷기를 멈췄다. 그때부터 혼자 걸었다. 처음에는 말동무, 길동무가 없어서 심심했으나 이내 적응이 되었다. 성당에 들렀다가 하늘사랑길을 걷고 덕구실 육교를 건너서 자전거길로 돌아오기도 했고 그 반대로 돌기도 했다. 혼자라서 생각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코스를 정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자전거가 끊이질 않고 자동차 소음이 들리고 도로를 향한 집들의 뒷마당에 삶의 분주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자전거길에서는 앞만 보고 걷는다. 탁 트인 하늘 아래 폭 너른 강과 나란한 하늘사랑길이 생각의 가지를 벋어가며 상상의 세계를 유영하기에 좋았다. 인적이 드물고 찻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면에만 침잠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소꿉각시를 만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도 듣는다. 청년이 된 미래의 손자와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떠난 이들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깡그리 잊었던 기억 속의 풍경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상상에 막힘이 없었다. 막힘이 없으니 영혼은 자유로웠다. 몇 편의 글은 이 길에서 잉태되고 자라고 생명을 얻었다. 구상 중인 글들도 하늘사랑길에서 성장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산책은 하늘사랑길에 맞췄다. 하늘사랑길에서 해를 마주볼 수 있도록 오전에는 자전거길을 먼저 걷고 덕구실 육교를 건너서 동쪽을 향해 걸었다. 오후에는 하늘사랑길로 먼저 나서서 서편의 해를 보며 걸었다. 하늘사랑길에서 만큼은 온전히 혼자이고 싶어서 그림자를 앞세우지 않으려 그리 하였다. 그림자의 흔들림에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기 강은 흐름을 멈춘 듯이 느리고 수면이 잔잔한 것이 호수를 닮았다고 해서 예부터 감호(鑑湖)라 불렀다. 강원, 충청, 경기 3도를 거쳐 온 긴 여정을 반추하며 두물머리에서의 북한강과의 만남을 앞두고 숨고르기를 하는지 감호에선 강의 숨결이 고요하다.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흐름이 없으랴! 유장한 속살의 흐름을 가늠해 본다. 가볍지 않게, 느리나 힘차게 낮은 곳을 채우고 마른 곳을 적시며 바다로 가는 인내를 본다.
돌아오는 길엔 그림자를 앞세운다. 하늘사랑길에서 길어 올린 반짝이는 상상과 빛나는 언어들이 내 그림자 속으로 자맥질한다. 안달하며 잡지는 않는다. 다시 하늘사랑길에서 바람에 씻기고, 쪽빛 하늘에 헹군 싱싱한 의미들을 건져 올릴 수만 있다면 감호 깊은 속살처럼 천천히 바다로 흘러가도 좋겠다.
2021. 12<아리수 강가에서 16>